[기고] 환자의 알 권리 위한 ‘통증전문의 표시제’ 도입해야

입력 2026-07-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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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은 단순한 증상이 아니다. 만성 통증은 환자의 일상과 직장생활, 학업, 가족관계는 물론 삶의 질 전반을 무너뜨리는 질환이다. 특히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 신경병증성 통증, 암성 통증과 같은 난치성 통증 질환은 정확한 진단과 숙련된 치료 경험이 예후를 크게 좌우한다.

하지만 통증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찾은 환자들은 정작 자신을 진료하는 의사가 통증 분야의 전문적인 교육과 수련을 받은 의료진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의료기관의 간판이나 홈페이지만으로는 통증 치료 경험과 전문성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렵고, 환자는 제한된 정보 속에서 의료진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최근 의료는 세부 전문성과 진료 역량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통증 치료 역시 초음파 유도 신경차단술, 고주파 치료, 척수자극술, 약물치료, 재활치료 등 다양한 치료법을 환자의 상태에 맞게 종합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고도의 전문 분야이다. 따라서 단순히 의사 면허나 전문과목만으로는 해당 의료진의 통증 치료 역량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현재 대한통증학회는 일정한 교육과 임상 수련을 이수하고 자격 요건을 충족한 의료진에게 통증 분야의 전문성을 인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문성은 환자들에게 충분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정부의 의료정보 제공 체계에서도 쉽게 확인하기 어렵다.

우리보다 먼저 통증의학을 발전시켜 온 미국과 유럽, 일본은 통증의학을 하나의 전문 분야로 육성하며 체계적인 교육과 인증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미국은 통증의학 세부전문의(Fellowship) 제도를 통해 전문성을 갖춘 의료진을 양성하고 있으며, 환자는 의료기관과 전문학회 등을 통해 의료진의 전문 분야와 자격을 확인할 수 있다. 유럽은 국가별 차이는 있지만 유럽통증연맹(EFIC)을 중심으로 통증의학 교육과 인증을 지원하고 있으며, 다학제 통증센터를 중심으로 전문 진료를 제공하고 있다. 일본 역시 일본통증학회와 관련 학회를 중심으로 통증 전문의 인증제도를 운영하며 전문 인력 양성과 만성통증 관리체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통증 치료 기술과 의료 수준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의료진의 통증 분야 전문성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제도는 여전히 미흡하다. 이제는 의료기술뿐 아니라 의료정보의 투명성과 환자의 알 권리도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해야 한다.

정부는 국민의 의료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해 의료기관 평가 결과와 전문병원 지정, 비급여 진료비 등 다양한 의료정보를 공개하고 있다. 이제는 이러한 정책을 한 단계 발전시켜 '통증전문의 표시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통증전문의 표시제는 환자가 의료기관을 방문하기 전 의료진의 통증 분야 전문성을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의료기관 내 안내 표지와 진료실 명패, 병원 홈페이지, 정부 의료정보 플랫폼 등을 통해 통증전문의 여부를 명확히 표시한다면 환자는 객관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에게 적합한 의료진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제도는 특정 의료인에게 특혜를 주자는 것이 아니다. 환자의 알 권리를 보장하고 의료 선택권을 확대하며 의료의 질을 높이기 위한 최소한의 정보 제공 장치이다. 전문성을 갖춘 의료진에게는 정당한 평가와 신뢰를, 환자에게는 안심하고 치료받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상생의 제도이기도 하다.

특히 CRPS와 같은 희귀·난치성 통증 질환은 치료 시기를 놓치거나 경험이 부족한 의료진에게 장기간 치료를 받을 경우 증상이 악화되거나 만성화될 위험이 크다. 환자가 처음부터 적절한 의료진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치료 성과를 높이고 불필요한 의료 이용과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표시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통증전문의가 전문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현실적인 건강보험 수가체계도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만성 통증 환자의 진료는 짧은 외래 진료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 환자의 병력과 통증의 원인을 면밀히 분석하고, 신체검진과 영상검사, 약물치료, 중재적 시술, 재활치료를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CRPS와 같은 질환은 환자마다 증상과 경과가 달라 충분한 진료시간과 풍부한 임상 경험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현재의 건강보험 수가체계는 통증 진료의 전문성과 난이도, 진료에 필요한 시간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해외 주요 국가들은 통증 치료를 단순한 시술이 아닌 전문적인 평가와 상담, 다학제 협진, 장기적인 관리가 필요한 의료서비스로 인정하고 이에 걸맞은 보상체계를 마련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전문적인 통증 평가와 상담, 중재적 통증치료, 다학제 진료 등에 대한 적정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의료진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환자를 진료할 수 있으며, 환자는 보다 안전하고 수준 높은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정부가 추진하는 의료개혁의 핵심은 환자 중심 의료이다. 환자 중심 의료는 충분하고 정확한 정보 제공과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에서 출발한다. 이제는 환자가 의료진의 전문성을 확인하는 일을 개인의 정보 수집 능력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 정부는 의료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전문성을 인정하는 제도와 적정한 보상체계를 함께 마련해야 한다.

극심한 통증으로 병원을 찾는 환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믿고 치료받을 수 있는 의료진과 지속 가능한 치료 환경이다. 통증전문의 표시제는 환자의 알 권리와 의료 선택권을 보장하는 제도이며, 적정한 수가체계는 통증전문의가 전문성을 지속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기반이다.

이제 정부와 국회, 의료계가 함께 통증전문의 표시제 도입과 통증 진료의 전문성을 반영한 건강보험 수가 개선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환자가 의료진을 선택할 권리와 전문의가 제대로 진료할 수 있는 환경은 함께 보장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환자 중심 의료이며, 대한민국 통증의료가 한 단계 더 도약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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