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절망의 산에서 희망의 돌을 깎아낼 수 있을 것이다.”
마틴 루터 킹의 형상은 절망을 덮어버린 모습이 아니다. 절망의 바위에서 희망의 돌이 앞으로 밀려 나온 형상이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만들어질 수 있다는 메시지다. 희망은 절망이 없는 곳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희망은 절망을 외면해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희망은 절망을 직면하고, 그 산을 통과하며, 그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깎아낼 때 탄생한다.
절망의 산을 피하지 않고 그 산을 뚫고 나올 때, 비로소 희망은 역사 속에 모습을 드러낸다.
문명도 마찬가지다. 문명의 적은 절망 그 자체가 아니다. 문명의 더 큰 적은 절망 앞에서 응전을 멈추는 안이함이다.
절망은 문명에 대한 도전일 수 있다. 그러나 절망 앞에서 응전하지 않는 안이함은 문명을 무너뜨린다. 문명의 출발점은 희망 없음 속에서 다시 희망을 만들어내려는 절실함이었다.
절실함, 곧 desperateness는 영어에서 기본적으로 ‘절박함, 필사적 상태, 궁지에 몰림’을 뜻한다. 그 어원적 뿌리는 라틴어 desperare와 연결된다. desperare는 de, 곧 ‘없이’ 또는 ‘잃다’의 의미와 sperare, 곧 ‘희망하다’가 결합된 말로, 문자 그대로는 ‘희망을 잃다’는 뜻이다.
그러나 문명사에서 중요한 것은 희망을 잃은 상태 그 자체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희망을 잃은 자리에서 다시 희망을 만들려는 의지다. 희망을 잃고 주저앉으면 그것은 절망이다. 그러나 희망 없음을 거부하고 다시 일어서면 그것은 절실함이다.
절망은 그 자체로 문명을 만들지 않는다. 절망은 무기력과 포기를 낳을 수도 있다. 문명을 만든 것은 절망 그 자체가 아니라, 희망 없음을 거부하고 다시 희망을 세우려는 몸부림이었다. 문명은 외부적 도전에 대한 창조적 응전의 결과였다.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문명의 발전을 도전과 응전의 역사로 설명했다. 문명을 성장시키는 것은 도전 자체가 아니다. 도전에 응전하는 사람이다.
역사에서 절망은 도전이다. 절실함은 응전의 에너지다. 절실함은 도전에 대한 창조적 응전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따라서 문명을 만든 것은 절망이 아니라, 절망 앞에서 희망을 다시 만들려는 절실한 응전이었다.
반대로 문명을 무너뜨리는 것도 절망 그 자체가 아니다. 절망 앞에서 포기하는 안이함이다. 그래서 문명의 가장 무서운 적은 야만도, 가난도, 기술의 부족도 아니다. 안이함이야말로 문명을 서서히 무너뜨리는 가장 큰 적이다.
안이함, 곧 Complacency의 어원은 라틴어 complacere이다. com-는 ‘함께’ 또는 강조의 의미를 지니고, placere는 ‘기쁘게 하다, 만족시키다’를 뜻한다. 즉 complacere는 ‘매우 만족하게 하다, 기쁘게 하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문명사에서 이 만족은 위험하다. 지나친 만족은 편안함을 만들고, 편안함은 긴장을 풀게 하며, 긴장이 풀린 문명은 도전을 보지 못한다. 안이함은 단순히 편안한 상태가 아니다. 너무 편해진 나머지 도전을 외면하고, 응전을 멈추며, 자기만족 속에서 쇠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태다. 이후 영어에서는 ‘자기만족, 현상에 대한 만족, 위험을 보지 못하는 안이함’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발전했다.
마틴 루터 킹의 “절망의 산에서 희망의 돌을 깎아낸다”는 문장을 문명론적으로 읽으면 토인비의 역사철학과도 만난다. 희망은 절망을 피해 얻는 것이 아니다. 절망에 응전할 때, 그 절망 속에서 희망은 탄생한다.
절망의 산은 도전이다. 희망의 돌은 응전의 결과다. 그리고 그 산에서 희망의 돌을 깎아내는 힘이 바로 절실함이다.
그러므로 절실함은 희망을 잃은 자리에서 희망을 다시 만들어내려는 창조적 응전의 에너지다. 그 응전의 결과가 바로 문명이다.
문명의 역사를 돌아보면, 문명은 가장 절실했던 순간에 가장 크게 성장했고, 가장 풍요롭고 안일했던 순간에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집트 문명을 보자. 나일강의 범람은 처음에는 절망의 조건이었다. 범람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위협이었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그 절망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들은 범람의 주기를 읽기 위해 달력을 만들고, 물을 다스리기 위해 관개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공동의 생존을 조직하기 위해 국가 체제를 만들었다.
절망만 있었다면 강은 그저 강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간절함이 있었기에, 강은 문명이 되었다. 절망은 강을 그대로 두지만, 절실함은 강을 문명의 기반 시설로 바꾼다. 이것이 문명사의 핵심 전환 구조다.
문명은 절망이 없는 곳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문명은 절망을 거부하고, 희망을 다시 만들려는 사람들의 절실함에서 태어났다. 절망은 멈춤을 만들 수 있지만, 절실함은 응전을 만든다. 그리고 그 응전이 혁신을 만들고, 제도를 만들고, 공동체를 만들며, 결국 문명을 만든다.
그러므로 문명의 적은 절망이 아니다. 문명의 적은 안이함이다.
절망의 산에서 희망의 돌을 꺼내는 힘, 그것이 절실함이다. 그리고 그 절실함을 역사로 바꾸는 힘, 그것이 창조적 응전이다.
문명은 바로 그 응전의 결과다.
문명의 힘은 풍요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절실함에서 나온다. 그러나 절실함만으로 문명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절실함은 문명을 움직이는 에너지이고, 꿈은 그 에너지가 향해야 할 방향이며, 공감은 그 꿈을 함께 행동하게 만드는 힘이다.
간절함은 꿈에서 나오고, 꿈은 세상에 대한 사명에서 나온다. 안이한 꿈은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그러나 절실한 꿈은 사람을 움직이고, 사람은 사회를 바꾸며, 결국 문명의 방향을 바꾼다. 문명을 움직이는 것은 절실한 꿈이다.
마틴 루터 킹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개인의 성공을 위한 꿈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의 존엄, 평등, 자유를 향한 꿈이었다. 마틴 루터 킹은 1963년 워싱턴 행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서 과거 노예의 후손들과 과거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을 수 있으리라는 꿈입니다.”
이 꿈은 처음에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절실함이 그 불가능을 역사적 가능성으로 바꾸었다. 꿈은 현실을 잊는 환상이 아니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만들어내는 용기다. 행동 없는 꿈은 구호에 머물지만, 절실한 꿈은 역사를 움직인다.
마틴 루터 킹은 또한 “지금이 바로 행동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꿈은 미래를 말하지만, 그 꿈이 절실할 때 사람은 오늘 행동한다. 절실함이 사라질 때 도전은 멈춘다. 도전이 멈출 때 문명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절실한 꿈은 문명의 방향을 바꾸는 힘이다. 오늘날 우리가 다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를 말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류를 위한 절실한 꿈이 있을 때, 절망의 산은 마침내 희망의 돌로 바뀌기 때문이다.
희망 없음의 절실함을 문명으로 발전시키는 힘은 꿈과 공감이다. 꿈은 문명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공감은 그 방향으로 사람들을 함께 움직이게 한다.
링컨은 공감의 리더였고, 마틴 루터 킹은 꿈의 리더였다. 링컨의 공감은 갈라진 나라를 다시 잇고 노예해방의 시대를 열었다. 마틴 루터 킹의 꿈은 절망의 산에서 희망의 돌을 꺼냈다.
결국 리더십의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꿈이고, 또 하나는 공감이다. 꿈은 고통 속에서 만들어질 때 큰 꿈이 된다. 공감은 고통 속의 사람을 다시 일어나게 하는 힘이 된다.
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 철학은 이렇게 말한다.
“어둠은 어둠으로 몰아낼 수 없다. 오직 빛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 증오는 증오로 몰아낼 수 없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
이 문장은 절망의 산에서 희망의 돌을 꺼내는 리더십의 본질을 말한다. 문명을 움직이는 리더십은 분노를 증폭시키는 리더십이 아니다. 사람을 다시 일으키는 리더십이다. 절망을 동원하는 리더십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 희망을 설계하는 리더십이다.
오늘날 인류는 문명의 대전환이라는 거대한 전환점 앞에 서 있다. 절망의 산에서 희망의 돌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마틴 루터 킹이 남긴 유산이며, 우리가 다시 새겨야 할 문명의 방향이다.
마틴 루터 킹의 문장은 문명대전환기의 방향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어둠은 어둠으로 몰아낼 수 없다. 오직 빛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 증오는 증오로 몰아낼 수 없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 절망에 응전한다는 것은 더 큰 절망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분노에 분노로 맞서고, 증오에 증오로 대응하는 것은 문명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한다. 절망에 대한 진정한 응전은 빛을 만들고, 사랑을 회복하며,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절실함이다. 절실함은 희망을 만들고, 희망은 꿈이 되며, 꿈은 사람을 움직이고, 사람은 문명을 바꾼다. 그러나 그 꿈은 증오의 꿈이 아니라 사랑의 꿈이어야 한다. 그 응전은 분열의 응전이 아니라 회복의 응전이어야 한다. 문명을 다시 일으키는 힘은 절망을 닮은 힘이 아니라, 희망을 만들어내는 힘이다.
문명의 힘은 절실함이다.
문명의 적은 안이함이다.
안이한 꿈은 문명의 적이고, 절실한 꿈은 문명의 방향이다.
마틴 루터 킹의 절망의 산은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절망 앞에서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면 그 산에서 희망의 돌을 깎아낼 것인가. 우리는 어둠에 어둠으로 맞설 것인가, 아니면 빛으로 길을 열 것인가. 우리는 증오에 증오로 응답할 것인가, 아니면 사랑으로 문명의 방향을 다시 세울 것인가.
문명의 미래는 절망의 크기가 아니라, 절망에 응전하는 우리의 절실함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절실함이 빛과 사랑을 향할 때, 절망의 산은 마침내 희망의 돌로 바뀐다.
절망에 대한 문명의 진정한 응전은 어둠과 증오가 아니라, 빛과 사랑으로 희망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서울대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도쿄대 경제학부 객원연구원, MIT 국제자동차프로그램(IMVP) 연구위원, 조지워싱턴대학 초빙교수 등을 역임했다. 대통령직속 국민경제자문회의 혁신경제분과 위원장, 유엔글로벌콤팩트 한국협회 이사, 신남방정책 민간자문위원을 역임하며 정부 자문 역할도 수행했다.
또한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포스코에너지 등 대기업의 자문교수 및 현대모비스·홈앤쇼핑·킨텍스 사외이사 등 산업계와 학계를 연결하는 산학연 허브형 리더로 평가받는다. 윤경ESG포럼 공동대표, 한국인도네시아경영학회 회장으로서 아세안과의 경영교육 및 교류 확대에도 힘쓰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사람중심 기업가정신'(2018), '이토록 신나는 혁신이라니'(2019), '플랫폼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2015) 등이 있다. 다수의 국내외 수상 경력도 보유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