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광장_이상미의 예술과 도시] 안중근 의사 유묵에 담긴 ‘忍(참을 인)'

입력 2026-06-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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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미래 고민했던 사상가 유지
국가·민족 욕망 자제해야 평화 이뤄
경매 나온 보물…시대정신 밝혔으면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남긴 유묵 한 점이 국내 경매시장에 출품된다. 오는 24일 경매에 오르는 ‘백인당중유태화(百忍堂中有泰和)’의 시작가는 16억원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고서화가 아니다. 1910년 사형 선고 직후 안중근 의사가 남긴 친필 유묵이자 국가유산청 지정 보물 제569-1호다.

유묵은 고인이 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을 뜻하지만, 역사적 인물의 유묵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마지막 순간까지 붙들었던 신념과 정신이 응축된 기록이기 때문이다. 특히 안중근 의사의 유묵은 독립운동가의 의지뿐 아니라 동양의 미래와 평화를 고민했던 사상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백인당중유태화는 백 번 참는 집안에 큰 평화가 있다는 뜻이다. 중국 당나라 장공예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얼핏 가정의 화목을 강조하는 교훈처럼 보이지만, 죽음을 앞둔 안중근 의사가 남긴 이 글귀는 더 깊은 의미를 품고 있다.

당시 안중근 의사는 일본의 침략정책을 비판하면서도 일본 국민 전체를 적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양 삼국의 상생을 주장했다. 이 유묵의 ‘인(忍)’은 개인의 인내를 넘어 국가와 민족이 욕망과 증오를 절제할 때 비로소 평화가 가능하다는 정치철학적 메시지로 읽힌다.

이번 출품은 여러 측면에서 상징성이 크다. 1972년 안중근 유묵이 일괄 보물로 지정될 당시 제1호로 선정된 작품이며, 보물 지정 안중근 유묵이 국내 경매에 출품되는 것도 처음이다. 당시 재판의 공식 기록인 ‘관동도독부법원 안중근 외 사형 판결문’ 유인본도 함께 출품돼 사료적 가치가 높다.

최근 안중근 유묵에 대한 시장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2023년 유묵 ‘용호지웅세 기작인묘지태’가 19억5000만원에 낙찰됐고, 지난해에도 옥중 유묵이 추정가를 웃도는 가격에 거래됐다. 이번 작품 역시 희소성과 상징성으로 치열한 경합이 예상된다.

흥미로운 점은 문화재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국가기관이 보존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했다면 이제는 민간 컬렉터와 기업도 문화유산 보존의 중요한 주체로 등장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국가적 상징성을 가진 문화재가 거래된 뒤 공공기관에 기증되거나 장기 대여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중요한 것은 소유 주체가 아니라 문화유산이 사회적 가치를 지속적으로 창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그러나 이번 경매의 의미는 낙찰가에 있지 않다. 우리는 왜 안중근의 글씨 한 점에 수십억 원의 가치를 부여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종이와 먹의 가격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역사와 정신의 가치 때문이다. 특히 안중근 유묵은 예술품과 사료, 그리고 정신적 유산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한 시대를 증언하는 기록물이면서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문화자산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경매는 단순한 소장품의 거래를 넘어 우리 사회가 역사적 가치와 공공성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를 되묻는 사건이기도 하다.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던 1910년 역시 제국주의와 군비경쟁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였다. 세계는 과거보다 훨씬 긴밀하게 연결돼 있지만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은 여전히 힘의 논리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분쟁이 보여주듯 국제사회는 여전히 대립과 충돌의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안중근 의사의 사상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그는 총을 든 의열투쟁가였지만 동시에 전쟁을 막고 공존의 질서를 만들고자 했던 평화사상가였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안중근은 하얼빈 의거의 영웅을 넘어 미래의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상했던 선구자적 지식인이기도 하다.

문화유산의 가치는 시장이 매긴 가격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대가 그 안에 담긴 정신을 얼마나 다시 읽어내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경매는 안중근의 글씨를 거래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가 남긴 평화의 사상을 오늘의 시대가 다시 마주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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