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풍경] 심야의 단상

입력 2026-06-1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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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넘었다. 소등하고 누운 지 30분은 훌쩍 지난 것 같은데, 아직 잠의 문턱을 넘지 못한 채 그 주변만 맴도는 기분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가. 담임선생님께 꾸중을 듣고 있었다. 내가 한 일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계속 부인했다가는 선생님이 더 크게 화를 내실 것만 같았다. 결국 고개를 숙인 채 죄인처럼 서 있었다. 중학교 2학년인지 3학년인지.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 사소한 오해로 주먹다짐까지 벌였던 기억.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월례고사를 망친 뒤 창피함과 괴로움에 며칠을 끙끙 앓았다. 대학 시절에는 실연의 상처로 자포자기하듯 몇 달을 흘려보내기도 했다.

문득 시계를 보니 새벽 1시가 넘어 있었다. 조용히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에 물 한 잔을 들이켠 뒤, 소파에 몸을 던지듯 기대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의식을 잃어 갔다.

“원장님, 요즘은 밤이 참 길고 외롭습니다. 무엇보다 예전에 잘못했던 일들이 계속 떠올라 저를 힘들게 해요.” “가게 손님도 점점 줄어들고요. 이러다 파산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 잠에서 완전히 깨 버립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공감이 된다. 가만히 되짚어 보면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께 칭찬받았던 기억도 있었고, 중학생 때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웃었던 수많은 추억도 있었다. 고등학생 때 성적이 올라 하늘을 날 듯 기뻤던 순간도 분명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깊은 밤이 되면 뇌는 그런 기억들은 제쳐 둔 채 부정적인 사건들만 골라 의식 위에 펼쳐 놓는다.

왜 그럴까. 아마도 행복했던 기억을 곱씹는 조상들보다 불안과 두려움, 분노를 반복해서 떠올리던 조상들이 생존에는 더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당신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라는 어느 시인의 문장은 어쩌면 현실과는 조금 거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당신은 생존에 가장 적합하도록 태어났다.”라는 말이 더 사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즘 수용전념치료(ACT)를 공부하면서 이런 생각들에 조금 덜 시달리게 되었다. 과거의 후회나 불안한 상상이 떠오르면 그 생각들 속으로 뛰어들지 않고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바라보려고 한다. 마치 타인의 일을 지켜보듯. “아, 지금 이런 생각들이 영훈이의 의식 속에 떠오르고 있구나.”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점차 생각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관찰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생각과 함께 떠내려가는 대신 그저 바라보는 것이다.

내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의 파편들을 없앨 방법은 없다. 그것들은 사라지라고 명령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저 바라보고 거리를 둘 뿐이다. 어쩌면 그것들은 천억 개의 뇌세포가 끊임없이 활동하며 만들어 내는 잡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반드시 의미를 부여해야 할 대상은 아니다.

“요즘은 그 방법을 사용하면서 훨씬 편해졌어요.” 편안한 미소를 짓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에는 초여름의 맑은 하늘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순간 영훈이의 뇌가 세상을 그렇게 경험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최영훈 일산연세마음상담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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