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년 이맘때면 한 가지 색에 시선이 쏠리곤 합니다. 색채 연구소이자 색채 전문기업인 팬톤(PANTONE)이 발표하는 '올해의 컬러'가 본격적으로 소비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시기이기 때문인데요.
팬톤이 매년 12월 발표하는 이듬해의 트렌드 컬러는 단순히 예쁜 색이 아닙니다. 패션과 뷰티, 디자인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상징적인 색으로 작용하죠.
지난해의 색은 '모카 무스(Mocha Mousse)'였습니다. 실로 지난해 패션·뷰티 트렌드 중심에는 모카 무스가 있었죠. 스웨이드 소재의 패션 아이템이 인기를 끌었고, 가수 청하의 무대 메이크업이 '가을 뮤트의 정석'이라는 설명과 함께 화제가 된 바 있습니다. 오븐에 구운 듯 따뜻한 느낌의 '다 굽자' 메이크업이 X(옛 트위터) 중심으로 유행하기도 했죠.
2026년의 컬러는 '클라우드 댄서(Cloud Dancer)'입니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구름을 연상케 하는 부드러운 흰색인데요. 우리나라 네티즌들은 '안 씻은 강아지 색', '꼬질꼬질한 몰티즈 색'이라는 귀여운 애칭도 붙여줬습니다.
흥미로운 건 이 색을 두고 나온 반응의 결이 예년과는 조금 달랐다는 점입니다. 팬톤 측이 급박한 해명(?)까지 내놓은, 단순한 호불호 표현 이상의 날 선 반응도 있어 눈길을 끌죠.

팬톤이 매년 발표하는 '올해의 컬러'는 단순한 색상 추천이 아닙니다. 팬톤은 이 색을 통해 한 해의 사회적 분위기와 정서를 압축적으로 드러내 왔죠.
올해의 컬러는 2000년을 앞둔 1999년, '세룰리안 블루(Cerulean Blue)' 선정으로 시작됐습니다. 짙은 청색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평온과 새로운 밀레니엄에 대한 갈망을 담고 있는 색상이었죠.
2000년을 앞둔 당시 전 세계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새로운 세기에 대한 흥분이 공존했습니다. 팬톤은 사람들이 이 불확실한 시대에 심리적 안정감을 찾고 싶어 한다고 분석했는데요. 국적이나 문화를 불문하고 누구나 하늘을 보며 안정감을 얻는다는 점에 주목, 내면의 평화와 충족감을 강조한 거죠.
팬톤은 이렇게 매년 전 세계 문화·산업 흐름과 사회적 환경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이듬해를 대표할 색을 제시해왔는데요. 테러와 팬데믹 등 굵직한 사건들이 색 선택의 배경으로 언급되기도 하면서 팬톤이 발표하는 색이 하나의 시대 언어처럼 읽히는 흐름도 만들어졌죠.
2026년의 컬러로 선택된 클라우드 댄서 역시 이런 맥락에서 등장했습니다.
팬톤은 클라우드 댄서에 대해 '소란스러운 세상 속 고요와 평온의 속삭임'이라고 정의했는데요. 디지털 정보의 홍수, 끊임없는 자극, 과도한 업무 속에서 조용한 성찰의 가치를 다시 일깨우는, 고요한 영향력을 지닌 맑은 화이트톤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자극에서 한 걸음 물러나 휴식과 몰입을 도우면서, 새로운 통찰과 대담한 아이디어의 등장을 이끈다고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례적인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팬톤이 제시하는 트렌드 컬러는 매년 각종 업계가 참고하는 지표로 곧잘 소비돼 왔지만, 이번에는 제법 날 선 비판이 쏟아져 눈길을 끌었죠.
가장 큰 비판은 '대담함의 실종'이었습니다. 토마스 맥밀란 텍사스 A&M대학교 경영대 교수는 팬톤의 선택에 대해 '대담함보다 안정성을 우선했다'고 평가했는데요. 그는 "화이트는 주거 공간 인테리어, 기본 의류, 패키지 디자인 전반을 지배하고 있어 새로움이나 발견의 감각을 주기 어렵다. 트렌드를 선도하는 기관이 소비자들이 이미 어디서나 보고 있는 색을 선택할 경우, 이는 미래를 제시하는 선언이라기보다 현 상태를 확인해주는 선택처럼 느껴질 수 있다"며 문화·마케팅적 파급력이 제한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흰색이 상징적으로도, 실제 활용 측면에서도 '기본값'에 가까운 색이라고도 설명했습니다. 그는 "페인트의 경우 모든 색은 화이트 베이스에서 출발하고 여기에 색 배합이 더해져 다른 색상이 만들어진다. 페인트를 넘어 주거, 패션, 패키징 전반에서 화이트는 가장 안전한 선택이다. 맞추기 쉽고 사용하기 편하며, 호불호가 크게 갈리지 않기 때문"이라며 "이미 여러 분야에서 출발점 역할을 하는 화이트를 '올해의 컬러'로 지정하는 건 소비자 행동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끄는 대신, 기존 기준선을 재확인하는 데 그칠 수 있다"고 전했죠.
일각에서는 창의적인 영감이 아니라 빅데이터나 인공지능(AI) 알고리즘이 도출한, 무난한 결과를 그대로 내놓은 것 같다는 비판도 나왔습니다.
여기에 정치·사회적인 맥락까지 겹쳤는데요. 북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이민 정책, 인종 이슈가 민감한 시기에 '화이트'를 전면에 내세운 선택이 의아함을 자아낸 거죠. 패션 디렉터이자 패션 평론가인 버네사 프리드먼은 뉴욕타임스를 통해 "최근의 정치적 담론을 고려하면 '화이트'라는 단어에서 건강하지 않은 이미지가 함께 떠오른다"며 "팬톤이 이런 부분까지 고려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충분히 불편한 방향으로 비틀릴 수 있다"고 짚었습니다. 색의 상징성이 지금의 현실과 맞물리며 예상치 못한 해석을 낳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이에 팬톤 측은 신속한 해명을 내놨는데요. 특정 인종을 연상케 한다는 지적에 대해서 '피부색은 선정 과정에서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며 '클라우드 댄서'라는 이름에 집중해 달라고 요청했는데요. "세상 어디에 있든 우리가 고개를 들면 볼 수 있는 구름이라는 보편적인 경험을 통해 인류가 연결되기를 바랐다"는 설명입니다.

관련 업계에서는 클라우드 댄서를 중립적인 톤으로 해석하려는 흐름도 감지됩니다. 다양한 연출을 가능케 하는 요소로 활용하면서요.
패션 분야에서는 화이트나 아이보리 계열을 활용한 스타일링이 콰이어트 럭셔리와 함께 두드러진 바 있습니다. 색의 존재감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실루엣, 소재, 질감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이 더욱 두드러질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옷의 구조와 디테일을 드러내는 접근으로, 강한 컬러 트렌드와는 결이 다른 선택지로 읽힙니다.
뷰티 역시 비슷한 흐름을 보입니다. 선명한 색조보다는 피부 표현, 광택, 투명감을 강조하는 방향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밀키한 화이트 네일이나 무채에 가까운 패키징 디자인처럼, 강조를 위한 색조보다는 '정돈된 인상'을 만드는 요소로 화이트톤을 활용하는 사례가 어렵지 않게 포착됩니다.
이런 움직임은 잘파 세대의 소비 성향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눈에 띄는 색보다 오래 사용 가능한 디자인, 즉각적인 유행보다 취향에 맞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미감이 선호되는 흐름이죠. 디토 소비가 확산된 환경에서, 화이트는 특정 유행을 좇기보다는 다양한 스타일을 받아들이는 안전한 선택지로 기능할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하나의 강한 컬러가 유행을 주도하기보다는 각자의 취향과 활용 방식에 따라 해석되는 색이 늘어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요. 패션과 뷰티 업계에서도 이 컬러를 단일한 메시지로 밀어붙이기보다는, 스타일링과 연출에 따라 다르게 쓰일 수 있는 톤으로 접근하는 모습이 이어질 전망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