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오랫동안 수확량 증대를 최우선 가치로 두며 흙의 순환을 잊었다. 볏짚과 부산물을 논으로 되돌리지 않고, 비료와 농약으로 효율을 높이려는 방식은 결국 흙의 미생물 다양성을 단조롭게 만들었다.
그 결과 탄소를 저장하고 수분을 유지하던 토양의 ‘완충력’은 빠르게 소진되었다. 지금의 토양은 단단한 기반이 아니라, 생태적 피로가 축적된 얇은 껍질 위에 있는 것에 가까운 셈이다. 문제는 이러한 이상 징후에 대한 우리의 대응 방식이다. 병해가 발생하면 약을 치고, 피해가 나면 보상금을 지급하는 사후적 대책 중심 농정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토양의 건강이 회복되지 않는 한, 어떤 기술도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농업은 생산 이전에 순환이며, 기술 이전에 관계다. 순환이 멈춘 흙에서 생산된 식량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최근 전 세계 농업정책은 ‘재생농업(regenerative agriculture)’을 핵심 의제로 삼고 있다. 주요 국가와 국제기구들은 재생농업의 도입을 촉진하기 위해 정책적 지원, 보조금 전환, 인증 기준 마련, 탄소 거래 등 적극적인 제도를 추진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친환경농법이 아니라, 토양 탄소 격리·생물다양성 회복·물 순환 복원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농업 패러다임이다. 미국과 유럽에선 이미 재생농법 실천 농가에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제도가 도입됐고,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공식 행사와 보고서에서 “토양은 회복력 있는 식량 시스템의 기반이며 우리가 소비하는 식품의 95%가 토양에서 생산된다. 건강한 토양은 지속가능한 농업 및 식량안보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우리에게도 이제 이러한 관점을 농정의 중심축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이다. 한국 농업은 여전히 생산량·소득 중심의 지표에 갇혀 있다. 하지만 농업이란 산업의 효율성만으로 평가될 수 없는 국가 생존의 기반 생태계다. 흙은 단지 작물의 매개체가 아니라, 탄소 저장소이자 미생물의 공동체이며, 농부는 생산자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이어주는 생태관리자다. 정책의 방향도 이제 ‘생산지원’에서 ‘순환복원’으로, ‘수확의 효율’에서 ‘흙의 회복력’으로 바뀌어야 한다.
기후위기의 시대에 농업은 더 이상 1차 산업이 아니다. 농업은 탄소를 줄이고, 생태를 되살리며, 지역공동체를 유지하는 국가의 생명 시스템이다. 따라서 농정의 혁신은 기술이 아니라 철학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 철학의 첫 문장은 어쩌면 이렇게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흙에게 돌려주며 살아왔는가.”
자연은 오래전부터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이제는 우리가 그 말을 들을 차례다. 회복은 언제나 순환에서 시작되며, 순환은 결국 관계로 돌아온다. 그 관계를 되살리는 일이, 미래 농업의 가장 큰 기술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