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내년도 부동산 공시가격 현실화율(시세 대비 공시가격 비율)을 올해와 동일한 수준으로 동결했다. 서울 아파트값 급등으로 보유세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한 것인데, 시민단체는 고가주택 감세 효과를 비판하며 반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현실화율 논쟁 이전에 공시가격의 개념부터 재정립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13일 열린 중앙부동산가격공시위원회에서 내년도 부동산 공시가격 현실화율을 올해와 동일한 수준으로 동결하기로 최종 의결했다. 공동주택 69%, 토지 65.5%, 단독주택 53.6% 등 현행 현실화율을 그대로 유지하는 내용이다.
부동산 공시가격은 재산세·종합부동산세 등의 과세 기준이 되며 건강보험료·기초연금 등 67개 행정제도의 기초 자료로 활용되는 핵심 자료다.
또 이날 국토교통부는 서울 서초구 한국부동산원 서울강남지사에서 ‘부동산 가격공시 정책 개선을 위한 공청회’를 열고 의결안과 동일한 수준의 동결 방침을 제시했다.
다만 공시가격 균형성 제고분을 통해 일부 지역은 연간 1.5% 이내로 공시가격을 추가로 올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시세 상승으로 공시가격이 올해에 비해 4% 올랐다면 이에 1.5%를 더해 공시가격이 전년에 비해 최대 5.5%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박천규 국토연구원 주택·부동산연구본부장은 공청회 발제에서 “현행 시세반영률을 1년간 유지하고 시장 변동을 점진적으로 반영하는 관리체계를 운영해야 한다”며 “급격한 조정보다는 제도의 안정성과 국민 수용성을 우선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동결 결정은 문재인 정부가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을 추진하기 전인 2020년 수준으로 4년 연속 동결하는 것이다. 애초 계획대로라면 내년 현실화율을 80% 안팎까지 끌어올릴 예정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정책 기조의 전환에 해당한다. 당시 로드맵은 공시가격을 2030년까지 시세의 90%까지 단계적으로 높이도록 설계됐으나 부동산가격 급등기와 맞물리며 서울 아파트 공시가격이 매년 두 자릿수로 상승해 논란이 이어졌다.
정부가 최종적으로 동결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세 부담 급증 우려가 자리 잡고 있다. 올해 들어 서울 아파트값이 크게 오르면서 현실화율을 유지하더라도 시세 변동만으로 내년 보유세가 크게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강남과 ‘한강벨트’ 주요 단지에서는 동일한 69% 현실화율을 적용하더라도 보유세가 30~40% 증가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여기에 ‘10·15 부동산 대책’으로 서울 외곽까지 규제가 확대한 뒤 민심이 악화되는 흐름 속에서 세제 부담을 키우기 어렵다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윤덕 국토부 장관도 지난달 국정감사에서 “윤석열 정부의 현실화율 조정 기조를 유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정부는 공시가격의 최종 목표치(시세의 90%)는 유지하되 먼저 가액대별 시세반영률 편차를 줄여 균형성을 높인 뒤 단계적으로 현실화율을 조정하겠다고 설명했다. 또한 공시가격 검증지원센터 도입·AI 기반 가격산정 모형 적용·초고가주택 전담반 구성 등 시세 산정의 정밀성 강화 조치도 추진할 계획이다.
반면 시민단체는 정부의 동결 방침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10일 참여연대·민달팽이유니온 등 주거 관련 단체들은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시가격 동결은 고가주택 보유자의 세 부담을 줄이는 조치로 이어져 자산 불평등을 심화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시세를 따라가지 않는 공시가격은 조세 형평성과도 맞지 않으며, 정부가 부유층 감세를 사실상 용인하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공청회 토론에선 동결 이후 공시제도의 방향과 구조를 어떻게 손볼지에 대한 세부적인 개선 요구가 나왔다. 특히 공시가격의 ‘개념’을 다시 정립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강춘남 태평양 감정평가법인 감정평가사는 공시가격 제도 내에서 혼재돼 온 ‘시장가격’과 ‘정책가격’의 개념이 모호해 국민 혼란을 키웠다고 지적했다. 그는 “공시가격을 시장가치를 반영한 정책 가격으로 법·제도적으로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며 “유형·가액대별 균형성 확보와 공시업무의 투명성·신뢰성 제고가 제도 안정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유승동 상명대 경영금융학부 교수도 같은 맥락에서 해외 사례를 들며 “북미·유럽은 ‘시장가치’와 과세·정책 목적의 ‘평가가치’를 명확히 구분한다”며 “우리 역시 공시가격을 ‘적정가치’로 재정의해 개념 충돌을 해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현행 공시법에서 ‘적정가격’ 정의와 ‘시세반영률’ 규정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지금의 개념 혼란을 방치하면 어떤 현실화율을 적용하더라도 국민에게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비판했다.
실거래 가격의 변동성을 공시가격이 그대로 따라가는 구조에도 비판이 제기됐다. 조정흔 경실련 토지주택위원장은 “급등기 실거래 한두 건이 시장 전체를 대표할 수 없다”며 “공시가격은 투기적 가격 흐름을 그대로 추종하기보다 안정성·지속가능성 중심의 별도 판단 기준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토부는 이날 논의된 의견을 향후 정책연구용역과 제도 개선 과정에 반영하겠다는 입장이다. 정재원 국토부 부동산평가과장은 “국민이 이해할 수 있는 명확한 개념 체계와 일관된 산정 방식이 필요하다”며 “공시가격의 예측 가능성과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 정비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