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M이 곧 경쟁력’…AI 데이터가 만든 구조적 성장
D램 가격 급등·투자 확대…내년 HBM4 효과 주목

2년 전만 해도 적자의 늪에 빠졌던 한국 메모리 반도체 산업이 올해 ‘사상 최대 이익’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인공지능(AI) 확산으로 데이터센터 투자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극적인 실적 반전을 이뤄냈다. ‘AI 슈퍼사이클’의 본격화로 글로벌 시장은 다시 한국 반도체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9일 반도체 및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코스피 4200선 돌파의 일등 공신 역시 반도체였다. 불과 2023년만 해도 재고 손실과 가격 급락으로 약 2조 원의 적자를 냈던 SK하이닉스는 올해 3분기 매출 24조4489억 원, 영업이익 11조3834억 원으로 역대 최고 실적을 기록했다. 삼성전자 역시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에서 7조 원의 영업이익을 내며 ‘반도체 부활’을 선언했다.
특히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메모리 부문의 3분기 영업이익률은 각각 40%, 30%로 글로벌 톱 수준이다. 김형태 신한투자증권 수석연구원은 “AI 중심의 수요 강세가 전 산업으로 확산되면서 메모리 시장 성장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이번 실적 반등의 중심에는 ‘AI’가 있다.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 서버 구동에 필요한 연산 처리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메모리 용량과 대역폭이 기업 경쟁력을 가르는 핵심 요소로 떠올랐다.
특히 고대역폭메모리(HBM)는 AI 반도체의 ‘두뇌 속 두뇌’로 불린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 H100·B100용 HBM3E를 독점 공급하며 글로벌 시장 점유율 60% 이상을 확보했다. 삼성전자는 HBM4 조기 양산에 착수해 엔비디아 공급을 확정 짓고, AMD·인텔과 차세대 GPU 공동 검증도 진행 중이다. 여기에 DDR5, 서버용 SSD 등 고성능 메모리 수요가 맞물리며 수익 구조가 완전히 바뀌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8일(현지시간) 대만에서 열린 TSMC 행사에서 “최신 ‘블랙웰’ GPU 수요가 매우 강력하다”며 “왕성한 AI 칩 수요에 자사 메모리 공급업체 3곳(SK하이닉스, 삼성전자, 마이크론테크놀로지)이 생산능력을 크게 확충하고 있으며 이들 3사로부터 최첨단 메모리 샘플도 받았다”고 밝혔다.
황 CEO의 이러한 발언은 AI에 대한 버블 우려가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나왔다. 지난주 나스닥지수는 한 주간 3.04%나 빠졌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상호관세 발표로 글로벌 투자자들이 패닉에 빠졌던 4월 초 이후 가장 큰 주간 낙폭이다.
반면 황 CEO와 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CEO 등 업계 관계자들은 AI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유지하고 있다. 아몬 CEO는 최근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AI의 발전을 인터넷 성장에 빗대며 “전 세계가 이 신기술이 얼마나 커질지 과소평가하고 있다”며 “오늘날 인터넷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다”고 강조했다. AI 수요 급증이 단기 붐이 아닌 구조적 성장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메모리 실물 가격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범용 D램(DDR4 8Gb 1Gx8) 평균 고정거래가격은 10월 7달러를 돌파해 6년 10개월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낸드플래시도 두 달 연속 두 자릿수 상승률을 나타냈다.
트렌드포스는 “4분기 PC용 D램 계약가격이 전 분기 대비 25~30% 오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DDR5 현물가는 하루 1달러씩 뛰며 연내 30달러 돌파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주요 메모리 업체들이 공급 협상을 잠정 보류하면서 ‘패닉바잉(panic buying)’ 조짐까지 나타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은 생산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전자는 평택·용인 클러스터 중심으로 AI 전용 라인을 확충하고, SK하이닉스는 청주 M15X 공장을 조기 가동해 HBM 전용 생산능력을 두 배로 늘렸다.
증권가는 AI 서버 투자가 내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본다. HBM4 양산이 본격화되면 평균판매단가(ASP)가 15~20% 추가 상승할 전망이다. 물론 AI 인프라 투자가 일정 부분 성숙기에 접어들 경우 내년 하반기부터 성장률 둔화 가능성도 제기된다. 다만 메모리 가격 하락폭은 과거보다 완만할 전망이다.
김형태 수석연구원은 “메모리 공급사들은 전환 투자 중심으로 내년 설비투자를 20~30% 확대할 것으로 보인다”며 “레거시(구형) 생산라인 축소가 가속화되면서 공급 증가 폭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