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본시장 체급 달라졌다
APEC 외교·관세 협상 훈풍
코스피 상승장 "끝이 아닌 시작"

코스피가 사상 처음으로 4000선을 돌파하며 한국 자본시장 역사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1983년 지수 체계 도입 이후 42년 만에 처음으로 ‘4000 고지’를 넘어서며 글로벌 증시 무대에서 체급을 높였다는 평가가 나온다. 외환위기(1997), 글로벌 금융위기(2008), 코로나 팬데믹(2020) 등 굵직한 충격 속에서도 ‘저평가 증시’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던 한국 시장이 마침내 구조적 성장 기반을 갖춘 시장으로 재평가받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27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날 코스피는 장중 4000선을 돌파하며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이날 코스피는 전날보다 1.48% 오른 3999.79에 개장해 곧바로 4000선을 뚫었다. 코스피가 4000선을 넘어선 것은 지수 산출 이후 처음이다. 지수는 이달 2일 3500선을 시작으로 10일 3600선, 16일 3700선, 20일 3800선을 잇달아 넘었고 결국 이날 장중 4000선을 돌파했다. 불과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500포인트 이상 상승한 것이다. 이번 흐름은 단기 기술적 반등이 아니라 시장 체력 변화가 확인된 구조적 상승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번 랠리의 중심에는 실적과 수출 회복이 있다. 과거 유동성에 기대 상승하던 시장과 달리, 현재는 기업 이익과 산업 경쟁력 강화가 주가를 끌어올리는 실물 중심 상승이 전개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AI 반도체 산업이 한국 증시 재평가의 기폭제가 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지난 한 달간 각각 16.7%, 36.4% 상승했으며 양사의 합산 시가총액은 1019조 원으로 사상 처음 1000조 원을 돌파했다. 글로벌 AI 투자 경쟁 속 HBM(고대역폭메모리) 수요 폭발이 반도체 업황 반등을 이끌며 한국 증시의 성장 서사를 다시 쓰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수급 흐름도 달라졌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달(10월) 들어 24일까지 코스피 하루 평균 거래대금은 16조6530억 원으로 2021년 6월 이후 4년 4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돈이 돌아오는 시장’으로 체감되는 장세가 펼쳐지고 있다는 의미다. 외국인 수급은 시장 체급 상승을 이끈 핵심 동력으로 꼽힌다. 외국인 보유 시가총액은 1125조 원(보유 비중 34.7%)으로 1년 전보다 493조 원 늘었다. 외국인 자금이 반도체·자동차·조선 등 한국 대표 수출 업종으로 집중 유입되며 지수 상승을 끌어올렸다.
한국 증시를 짓누르던 대외 불확실성도 해소 국면에 접어들었다. 미·중 통상 갈등이 완화 흐름으로 전환되는 가운데 APEC 정상외교와 한·미 관세 협상 진전이 투자심리를 되살렸다. 특히 반도체·자동차를 둘러싼 한·미 관세 협상은 사실상 ‘타결 임박’ 단계로 평가된다. 정부는 지난 16일과 22일 두 차례 워싱턴DC에서 미국 상무부와 실무 협상을 진행하며 한국산 전기차·배터리·차량용 반도체에 대한 관세 적용 제외 또는 단계적 감축 방안을 조율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이재명 대통령은 29일 열리는 APEC 정상회담에서 관세 조정 원칙에 최종 합의할 가능성이 거론되며 기대감을 키우고 있다. 시장에서는 “최악의 무역 리스크는 넘었다”는 평가가 확산되고 있다.
강진혁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은 APEC이었다”며 “한·미(10월 29일)·미·중(30일)·한·중(11월 1일) 정상회담 일정이 확정되면서 글로벌 자금의 위험자산 선호 심리가 회복됐고 한국 증시가 그 최대 수혜지로 부상했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코스피 4000 돌파를 두고 ‘끝이 아닌 시작’이라고 진단한다. 여전히 한국 증시는 밸류에이션 여력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현재 코스피 PBR은 1.2배로 미국 S&P500(4.7배), 일본 TOPIX(1.6배) 대비 낮다. 양일우 삼성증권 연구원은 “코스피 4000 돌파는 지수 이벤트가 아니라 한국 증시 체질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라며 “반도체 이익 모멘텀과 수출 개선, 외국인 수급 복귀가 결합된 구조적 상승 사이클이 진행 중”이라고 분석했다.
태윤선 KB증권 연구원은 “코스피 4000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며 “한국 증시는 이제 저평가 시장에서 성장형 자본시장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