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들의 청소년·청년기는 문화 황금기였다.
1990년대 대중문화는 서태지 등장을 계기로 밴드음악과 댄스음악, 힙합, 트로트, 발라드 등 다양한 장르가 공존하는 르네상스가 열렸다. 카세트테이프, CD는 당시 흔한 선물이었다. 패션 시장도 호황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학원 액션 만화가 유행하고 슬램덩크를 비롯한 일본 만화, 음반, 영화가 본격적으로 수입되면서 길거리 브랜드, 개성을 강조하는 패션이 퍼졌다. 여기에 피시방 등장으로 전국이 꽤 오랫동안 스타크래프트 열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외환위기 등 암흑기도 있었으나, 아직은 공동체 문화가 견고했고 희망도 존재했다. 부자든 빈자든, 사장이든 직원이든, 집주인이든 세입자든 서로서로 보듬었다. 여기에 전 국민이 광장에서 ‘대한민국’을 외쳤던 2002년 월드컵도 위기를 버티는 힘이 됐다.
그런데,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했다. 아이돌 등장 후 대중문화의 다양성이 사라졌고, 급격한 디지털화로 만남의 장소였던 서점과 만화방, 음반매장들이 문을 닫았다.
공동체도 해체됐다. 경험과 인품이 아닌 자가 여부와 아파트 브랜드를 중심으로 사람의 ‘급’이 나뉘었다. 이 급은 사람들을 서로 섞이지 않는 이질적 집단으로 나누었다. 스마트폰 보급 이후에는 온라인 커뮤니티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일상이 지배됐다. 익명성을 바탕으로 비교와 평가, 혐오가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디지털 세상에선 ‘인생의 정답’이 제시되고, 이 정답에서 벗어난 삶을 사는 이들은 도태된다. 개성은 박수가 아닌 조롱을 받았다.
영포티의 소비·문화생활 방식은 새로운 현상이라기보다는 회귀에 가깝다. 현재에서 도피해 가장 행복했던 시기의 자신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는 패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런데, 영포티는 ‘젊은 척하는 40대’를 비꼬는 멸칭으로 변질한 지 오래다. 영포티를 조롱하는 이들은 ‘저들이 왜 저럴까’ 생각하기보다는 겉으로 보이는 옷차림만 지적한다.
이는 단순한 ‘영포티 조롱’을 넘어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 현상’과 맞닿아 있다. 강력범죄 사건이나 개인의 기행·일탈을 다룬 기사에 ‘중국인 아니냐’는 댓글이 도배되고, 캄보디아 납치·감금 사건을 다룬 기사에 피해자를 탓하는 댓글이 수백, 수천 개의 추천을 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 범죄자의 실제 국적과 캄보디아 납치·감금 피해자의 억울함에는 관심이 없다. 그냥 누군가를 혐오하고 싶은 사람에게 명분이 생긴 것뿐이다. 영포티는 그저 만만한 과녁이다. 과거 이내남·이대녀가 그랬고, 고령층이 그랬고, 다문화 가족과 다자녀 저소득층도 그랬다.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결과에는 이유가 있고, 배경이 있는데 이유와 배경은 모두 무시된다.
이런 관점에서 영포티 조롱은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포용하지 않는, 죄의식 없이 타인을 평가하고 혐오하는 게 만연한 사회는 미래가 없다. 이제는 사회에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이 사회가 정상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