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등 연구생태계 붕괴 위기 직면
이공계 투자 확대…선제노력 절실해

미국의 과학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진행 중이던 연구 사업이 전격 중단되고, 수천 명의 과학자가 일자리를 잃어버렸다. 내년에는 상황이 더욱 나빠진다. 미국과학진흥협회(AAAS)에 따르면, 내년도 연구개발 예산이 1540억 달러로 올해보다 25%나 삭감된다. 지난 한 세기 중 가장 작은 규모가 될 것이라고 한다. 세계의 과학과 혁신을 이끌어왔던 미국의 시대가 빠르게 막을 내리고 있다는 뜻이다.
상황은 심각하다. 이미 수십억 달러의 예산을 회수당하고, 상당수의 연구 인력을 잃어버린 연방 정부 기관의 사정이 내년에는 더욱 어려워진다. 국립과학재단(NSF)과 국립보건원(NIH)의 예산은 각각 56.9%, 39.3%가 삭감된다. 항공우주국(NASA)의 연구예산도 47.3%나 줄어든다. 화성에 성조기를 꼽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 일성은 공허한 것이었다. 질병통제센터(CDC)·환경보호청(EPA)·해양대기청(NOAA)·미국지질조사국도 홍역을 치른다.
특히 기후변화와 생태계 보존에 관한 연방 정부 연구비는 전액 삭감되고, 기상·재난 예보용 인공위성의 운영도 중단하겠다고 한다. 온실가스 배출을 규제하고 있는 청정대기법의 유효성을 인정한 2007년 대법원 판결을 무력화해 버리겠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고집을 내년에는 기필코 밀어붙이겠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기후 위기에 대한 지극히 회의적인 예측과 가정이 여전히 과학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허풍·과장이었다는 것이 EPA의 새로운 입장이다.
유엔 총회에서 기후 위기 담론을 정면으로 부정했던 트럼프 대통령의 파괴적 연설은 빈말이 아니었다. 미국 한림원의 절박한 반론은 트럼프에게 마이동풍(馬耳東風)일 뿐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과학에 대한 거부감은 이념적인 것이다. 트럼프 1기가 ‘어둠의 터널’이었다는 미국 과학자의 기억은 절박한 것이었다. 특히 식량 생산과 기후 위기 대응에 필요한 연구 사업을 거부했고, 코로나19 대응에서 전문가의 조언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결국 미국 인구의 30%인 1억 명이 감염되고, 122만 명이 코로나19로 사망하고 말았다. 정치인의 억지 앞에서는 아무리 좋은 기술도 빛 좋은 개살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과학계의 인사도 망사(亡事)가 돼버렸다. 대선 과정에서 자신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대표적인 백신 반대 운동에 앞장섰던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를 보건부 장관에 전격 발탁했다. 국립보건원·질병통제센터의 예산을 삭감하고, 인력을 축소하고, 아동 백신 프로그램을 축소해버린 것이 바로 케네디 장관의 작품이다. 최근에는 멀쩡한 타이레놀(아세트아미노펜)이 자폐아 출산으로 이어진다는 엉터리 괴담으로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다. NASA 수장 지명 및 철회 논란을 일으킨 제러드 아이작먼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트럼프의 선거 캠프에 200만 달러를 기부한 인물이고, 제이 바타차리아 NIH의 원장은 팬데믹 당시에도 인위적인 방역을 반대했다. 석유 시추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하원에서 친환경 법안을 반대하던 리 젤딘 EPA 청장에 대한 눈길도 곱지 않다.
하버드·컬럼비아·코넬 등 주요 대학의 연구비도 대폭 삭감하고, 외국인 학생·교수도 줄이라고 강요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강요하는 미국우선주의·반(反)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반이민주의 기조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일부 대학이 트럼프 행정부의 요구가 대학의 자율을 침해한다고 반발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미국 과학계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 실제로 지난 3월 말 네이처가 미국 과학자 1600명에게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75%가 “미국을 떠나고 싶다”고 답했다. 지난 5월에는 사이언스가 “수십 년에 걸쳐 쌓아온 미국의 연구생태계가 트럼프 행정부 2기 100일 만에 붕괴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 전역에서 과학자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뉴욕타임스가 미국 과학의 참혹한 현실을 ‘잃어버린 과학’이라고 부르고 있다. 미국 과학의 붕괴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필요하다.
미국 대학 교육의 무임승차나 미국과의 국제협력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공계 대학과 출연연구소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과학계의 문호를 적극 개방하는 선제적 노력이 절박하다. 미국 과학의 붕괴를 반길 수는 없지만 현실을 무작정 외면할 수도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