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5년간 한국은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19 팬데믹, 지정학적 충격 속에서도 세계 10위권 경제를 유지했다. 위기 대응력은 입증됐지만, 과거의 방식만으로는 버티기 어렵다. 추격형 모델은 수명을 다했다. 산업화를 떠받친 △인구 증가 △보편 교육 △중화학공업 △자유무역의 네 축은 성장 동력에서 오히려 제약 요인으로 바뀌고 있다. 생산가능인구는 줄고, 교육은 창의 역량을 충분히 끌어내지 못한다. 수출 구조는 반도체ㆍ자동차ㆍ조선에 고착돼 20년 넘게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박양수 대한상공회의소 지속성장이니셔티브(SGI) 원장은 “양적 성장의 시대는 이미 끝났다”며 “주력 수출품은 20년째 변하지 않았고 세계 무역 질서도 보호주의로 후퇴했다”고 진단했다. 이어 “AIㆍ로봇의 교육ㆍ제조 현장 적용, 기후기술과 첨단산업에서의 선점이 관건”이라고 했다. 그는 “기업 환경을 개선하지 못하면 우수 기업이 해외로 빠져나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도 “압축 성장의 엔진은 이미 꺼졌다”고 평가했다. “정부가 직접 성장의 ‘플레이어’가 되기보다 규칙과 인프라를 설계하는 ‘플랫폼 제공자’로 전환해야 민간 주도의 혁신이 작동한다”는 설명이다.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은 명료하다. 과거의 성장 공식은 효력을 잃었고, 질적 전환 없이는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대만과의 대비는 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대만은 반도체를 국가 전략으로 못 박고 정부ㆍ기업ㆍ학계가 일관된 삼각 협력을 구축했다. 그 결과 TSMC는 엔비디아·애플 등 글로벌 핵심 고객을 확보하며 공급망 신뢰를 공고히 했다. 안정적 인재 풀과 정책 일관성도 뒷받침됐다. 반면 한국은 메모리 강자(삼성전자ㆍSK하이닉스)를 보유하고도 내수 부진과 정책 불확실성, 환율ㆍ금리 리스크에 발이 묶였다. 비메모리ㆍ파운드리 확장은 더뎠고 산업 다변화는 지체됐다. 선택과 집중, 전략의 일관성이 국가 경쟁력을 갈랐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향후 15년의 성패를 수출 전략의 재설계에서 찾았다. 내수 포화로 세계가 원하는 상품을 내놓지 못하면 성장 여지는 제한적이라는 판단이다.
최병호 고려대 AI연구소 교수는 “수출이 사실상 유일한 해법”이라고 단언했다. 최 교수는 K팝ㆍ웹툰ㆍ게임을 묶은 지적재산권(IP) 융합 산업을 예로 들며 “문화와 기술의 결합은 단순 콘텐츠를 넘어 글로벌 플랫폼이 될 수 있다”고 피력했다. 케이팝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흥행은 그 확장성을 보여준 사례다. 그는 이어 “라인(Line) 같은 메신저ㆍ결제 서비스처럼 생활 전 주기를 담는 플랫폼, AI 칩 기반 제품처럼 생활과 기술을 동시에 바꾸는 수출 상품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박 원장은 “제조업을 AIㆍ로봇과 결합해 생산성을 높이고 그 자체를 상품화하는 ‘피지컬 AI’ 전략이 필요하다”며 “스마트팩토리와 휴머노이드를 결합해 고부가가치를 창출하고, 글로벌 분업구조에 능동적으로 편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후 대응도 산업 경쟁력의 분수령으로 지목된다. 박 원장은 “2040년이면 에너지 수요 폭증을 관리할 수 있느냐가 성장의 분기점이 될 것”이라며 무탄소 전원 확대, 전력망 유연성 확보, 요금제 개편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이인식 지식융합연구소장은 “녹색기술이 사후 대응이라면 청색기술은 오염 자체를 막는다”며 “한국은 나노ㆍ바이오 강점을 살려 탄소중립과 성장을 동시에 달성해야 한다. 지방대학을 거점으로 산학연관 협력을 강화하고 의료ㆍ돌봄 인프라를 확충해야 한다”며 광주과학기술원(GIST) 청색기술경제센터를 사례로 꼽았다. 수출 전략과 기후 전략을 동시에 재설계해야 2040년 경쟁력이 유지된다는 진단이다.
수출과 산업 전략만으로는 성장의 지속성을 보장할 수 없다. 인구 구조와 노동시장이라는 사회 기반의 균열을 메우지 못하면 경제 전반이 흔들릴 수 있다.
전문가들은 초저출산을 가장 심각한 위험으로 꼽는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지난해 기준 0.75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저다. 단기 현금 지원의 효과는 미미하다. 주거ㆍ교육ㆍ돌봄이 결합된 장기 신뢰 체계가 있어야 출산ㆍ양육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조준모 교수는 “장려금만으로는 출산 결정을 바꾸기 어렵다”며 돌봄의 산업화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돌봄을 국가 서비스화해 고용과 성장을 동시에 끌어내야 한다는 논리다. 이인식 소장은 지방대학을 거점으로 한 산학연관 협력과 의료·돌봄 인프라 확충을 강조했다. 그는 “돌봄 인프라가 부실하면 고령사회 자체가 흔들린다”고 경고했다. 박 원장 역시 “전략적 이민 확대 없이는 미래가 없다”며 외국인 정착 지원과 지역 커뮤니티 케어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노동시장의 구조적 전환도 불가피하다는 게 석학들의 일관된 목소리다. 박 원장은 “많은 사람이 일하는 사회에서 적은 인원이 효율적으로 일하는 사회로 바뀌어야 한다”면서 “AI는 대체자가 아니라 인간의 창의ㆍ공감 역량을 강화하는 동반자”라고 했다. 최 교수는 “2040년 노동은 인간×AI 멀티에이전트 협업이 표준”이라고 내다봤다. 단순·반복은 기계가 맡고 인간은 전략·창의에 집중하는 구조다.
조 교수는 “노동은 유연하게, 안전망은 두텁게”를 원칙으로 직업훈련ㆍ고용서비스 디지털화를 해법으로 제시했다. 그는 “정부의 6대 전략산업 육성 방향성은 적절하지만 성패는 집행 방식에 달려 있다”며 “한국은 단순 참여국을 넘어 ‘글로벌 공급망 설계국’이 돼야 한다. 또 핵심 인재를 붙잡기 위해 학위–취업–비자–가족 정주를 연결하는 종합 거버넌스와 전략적 이민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석학들은 한국의 2040년을 좌우할 세 축으로 기술·인재·금융을 꼽는다.
조 교수는 “킬러 기술과 핵심 인재가 국가를 먹여 살린다”면서 학위→취업→비자→가족 정주환경까지 한 번에 연결하는 종합 거버넌스를 요구했다.
최 교수는 과학자 처우와 위상을 짚었다. 그는 “능력으로 평가하고 그에 맞는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며 “세계 최고 전문가가 수천억 원 가치를 인정받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혁신이 정착한다”고 주문했다.
박 원장은 금융 개혁을 지목했다. 그는 “부동산 담보 중심의 금융을 기업 혁신 자금 중심으로 바꾸고,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활성화를 위해 금산분리 원칙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자금 흐름이 바뀌지 않으면 기술과 인재도 뿌리내리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한국 현대사는 위기 때마다 반전을 써왔다. 1960년대 산업화, 1997년 외환위기 극복,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방역과 반도체 공급이 그 사례다. 전문가들은 지금을 “재설계의 순간”이라고 규정한다. 압축 성장의 공식은 이미 수명을 다했다. 저출산·기후 위기·기술 전환·지정학 리스크가 겹쳤지만 새로운 기회는 남아 있다. 구조 혁신을 어떻게 설계하느냐가 2040년 한국의 성패를 가를 전망이다.
창간 15주년을 맞은 이투데이는 지난 15년을 돌아보고 앞으로 15년 한국 경제가 다시 설계해야 할 과제를 짚어본다. 기술에서 앞서고, 인재를 붙잡고, 금융이 생산적 혁신을 지원할 때 한국은 저출산ㆍ기후ㆍ기술ㆍ지정학의 다중 도전을 넘어 또 한 번의 도약을 시도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