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달도 채 버티지 못하는 양의 물.
재난 영화 속 위기가 아닙니다. 강원 동해안 대표 피서지인 '강릉시'가 맞닥뜨린 현실인데요. 극심한 가뭄을 겪고 있는 강릉은 오늘(20일)부터 제한 급수에 돌입했습니다. 강릉 사상 초유의 일이죠.
심각한 물 부족은 비가 쏟아지지 않는 이상 당장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죽하면 공무원들이 대관령에서 두 차례 기우제까지 지냈을까요.
그런데 불과 60㎞ 떨어진 속초는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수만 명이 물총을 쏘며 즐기는 '워터밤' 축제 준비에 한창인데요. 이웃 도시가 동시에 '제한 급수'와 '물 축제'를 맞이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강릉시의 제한 급수 조치에 따라 오늘 오전 9시부터 주문진읍과 연곡면, 왕산면 지역을 제외한 18만 명이 사용하는 홍제정수장 급수구역 전역, 사실상 시내 대부분 지역의 계량기가 50% 잠겼습니다. 약 18만 명이 쓰는 물을 절반으로 줄이는 강제 조치인데요. 강릉시는 이를 통해 세대별로 약 40%의 절수 효과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결심을 내릴 수밖에 없던 상황입니다. 강릉 생활용수의 87%는 강릉 성산면의 오봉저수지에서 나옵니다. 강릉 시민들의 중요한 식수원인데요. 최근 물이 바짝 말라 바닥이 드러났고 잡초까지 무성하게 자라났습니다. 19일 기준 이곳의 저수율은 21.8%. 1977년 저수지가 만들어진 지 48년 만에 역대 최저치에 해당합니다.
이 물로는 25일을 버틸 수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심각한 상황인 만큼 제한 급수는 무기한으로 계속되는데요. 농업용수 외에 가정용 생활용수까지 제한 공급하는 건 이례적입니다.
이번 물 부족의 원인으로는 우선 올여름 날씨가 거론되는데요. 올해 강릉의 누적 강수량은 386.9㎜로 평년의 절반 수준에 그쳤습니다. 태백산맥을 넘어온 바람이 고온 건조해지는 푄현상이 영동 지역에 이어지며 습기를 말려버렸는데요. 북태평양 고기압을 따라 덥고 습한 남서풍이 들어와 많은 비를 뿌리는 영서와 상반되는 모습이었죠. 비다운 비도 내리지 않았을뿐더러 폭염 탓에 조금 내린 강수량마저 빠르게 증발했습니다. 여기에 하천의 지형적 특성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됩니다. 영동 지역은 급경사인 지형 특성으로 강 유역이 짧고 유속이 빨라 비가 오면 금세 동해로 물이 흘러 나가버립니다. 올여름 내내 이어진 폭염에 지형적 한계까지 겹치면서 수자원 확보가 더욱 어려워진 겁니다.
문제는 다음 달까지 뚜렷한 비 예보도 없어 물 부족이 당분간 불가피하다는 거죠.
김홍규 강릉시장은 전날 기자회견에서 "(일주일 내에) 저수율이 10%대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오봉댐 조성 이후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전대미문의 재난 상황"이라며 "9월까지 뚜렷한 강수예보가 없으며 현재 저수량 기준으로 사용 가능 일수가 약 25일에 불과해 생활용수 공급에 심각한 차질이 우려되는 만큼 시 전체가 총력 대응해야 할 엄중한 위기 상황"이라고 전했는데요.
이어 "그동안 강릉시는 선제적 대응을 통해 버텨왔지만, 이제는 전략적 관리가 불가피한 상황이라 제한 급수를 시행하게 됐다. 저를 비롯한 공직자 모두가 시민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민 여러분의 이해와 적극적인 협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호소했죠.
이에 시민들도 물 절약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일부 식당과 카페는 정수기 대신 생수를 쓰거나 영업시간을 줄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서울시는 '병물 아리수' 8400병을 긴급 지원, 가뭄 상황이 지속되면 즉각 추가 공급에 들어갈 방침임을 밝혔습니다.

유례없는 물 부족으로 제한 급수를 경험한 건 강릉만의 일이 아닙니다. 곧 워터 페스티벌 '워터밤'을 개최하는 속초시도 과거 수차례 제한 급수를 시행한 바 있죠.
속초시는 2000년대 들어서 2018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대규모 제한 급수를 벌였습니다. 강릉과 마찬가지로 주 취수원인 쌍천이 짧은 데다가 경사가 급한 지형 때문에 하천에 흐르는 물의 양이 많지 않은 만큼 갈수기면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려야 했죠.
2018년에는 하루 약 1만3000톤의 물이 부족해 무려 100일 넘게 제한 급수를 실시했습니다. 심야 시간대 제한 급수에서 아파트를 대상으로 격일제 제한 급수까지 시행하는 등 범위도 확대됐는데요. 비상 급수 차량까지 동원해 물을 실어 날랐습니다. 당시에도 평년보다 비가 매우 적은 수준으로 내리면서 우려를 높인 바 있죠.
2023년 5월에는 전남 완도군 지역이 제한 급수를 해제해 주민들의 쾌재를 불렀습니다. 2022년 5월 시작된 제한 급수가 단비가 내린 덕분에, 무려 1년여 만에 해제된 겁니다. 완도 지역의 2022년 총 강수량은 평균에 못 미치는 765㎜로 평년 대비 절반 정도에 그친 바 있습니다. 당시 완도군 전체 10개 수원지 저수율은 22%에 불과했죠.
이 같은 물 부족은 일상화된 기후 위기의 한 단면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기상 전문가인 반기성 케이클라이밋 대표는 2018년 속초의 제한 급수와 관련해 "가뭄은 그렇게 대처할 만한 방법이 별로 없다. 지금도 가뭄이 들면 소방차나 급수차를 동원해서 제한 급수할 때 물을 공급한다든가, 밭작물에 물을 뿌리는 정도밖에 하지 못하고 있다"며 "그런데 최근 기후 변화로 가뭄이 점점 더 증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00년 이전, 1980년대부터 관측한 자료를 보면 연 0.36회 정도 가뭄이 들어왔는데 2000년 이후에는 0.69회 정도 들어오고 있다. 약 2배 증가했다는 말"이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는 "친환경 간이 댐을 만들거나 관정, 인공 강우 기술을 개발해서 도움을 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장기적인 대책의 필요성을 짚었죠.

과거 수차례 제한 급수를 실시할 정도로 물 부족에 허덕인 속초는 올여름 각종 워터 페스티벌을 진행하면서 눈길을 끕니다. 강릉처럼 가뭄 피해가 컸다면 꿈에도 꾸지 못할 일이었겠죠.
우선 지난달 26일 속초종합운동장에서는 가수 싸이의 '싸이흠뻑쇼 서머스웨그2025(SUMMERSWAG2025)'가 열렸습니다. 이날 공연에는 2만3855명의 관람객이 운집했습니다. 20일 속초시와 KT, 고려대학교 디지털혁신연구센터가 공동으로 수행한 통신 및 소비 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이 중 속초시에 살지 않는 이들은 2만1000여 명으로 전체 88%에 달했는데요. 외지인 관광객 중 22.3%는 공연 후에도 24시간 이상 속초에 머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다수의 관광객이 1박 이상 숙박형 관광을 즐긴 것으로, 콘서트만 보고 떠나는 것이 아닌 장기 체류형 소비 구조가 형성됐다는 사실을 보여주죠.
특히 이날 하루 속초시에서는 총 75억 원이 소비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전주 60억 원 대비 25% 이상 급증한 수치인데요. 특히 속초시에서 돈을 쓴 관광객 중 서울‧경기‧인천의 기초자치단체에 사는 이들이 상위 20권을 대부분 차지해, 수도권 소비가 속초 현지 상권까지 직결됐음을 나타냅니다.
속초시는 23일 '워터밤 속초 2025'로 이 열기를 이어갑니다. '워터밤은' 흠뻑쇼처럼 물줄기를 쏘아 올리는 대표적인 여름 브랜드 페스티벌이죠.
수년 전까지만 해도 제한 급수를 결정할 수밖에 없던 속초는 2021년을 기점으로 달라졌습니다. 쌍천 암반층에 차수벽을 세워 63만 톤 규모의 지하댐을 완공한 뒤로는 '물 자립 도시'를 선언할 만큼 톡톡한 효과를 보고 있다는 분석인데요. 이 지하댐은 하루 최대 1만2500톤의 물을 공급하며 최대 60만 톤을 저장할 수 있는데요. 속초시민과 관광객의 한 달 이상 식수 수요를 충족하는 양입니다.
강릉시는 향후 저수율이 15% 밑으로 떨어지면 계량기 75%를 잠그고, 평창(일 700톤), 동해(일 300톤), 양양(일 200톤) 등 인근 지자체로부터 급수 지원을 받을 예정입니다. 저수율이 하루에 0.5~0.6%씩 줄어들고 있는 걸 감안하면 비가 내리지 않을 경우 10여 일 내로 추가 조치가 이뤄질 전망이죠.
또 오봉저수지 상류인 도마천 준설로 담수율을 높이고 내년 상반기에는 남대천 대형관정 개발을 추진, 하루 1만 톤 이상의 추가 용수원을 확보할 계획인데요. 연곡∼홍제 송수관로 복선화와 함께 오봉저수지 담수 용량 확대, 남대천 지하 저류댐 설치, 재이용수 활용, 노후관거 정비 및 현대화를 조기 추진할 방침입니다.
하지만 이 같은 계획이 성과를 내려면 시간과 재원이 필요합니다. 강릉에 당분간 비 소식이 없는 만큼 시민 불편은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큰데요. 기후 위기 속에서 가뭄 역시 점점 더 잦아지고 강해질 것이라는 사실이 우려를 더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