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 역내 생산 우대 규정에 수출 제동 우려
현지 생산·JV 설립·기술 이전·MRO 등 ‘현지화 전략’ 본격화
“가격 경쟁력 이상의 협상력 강화 및 전략적 협력 확대해야”
전 세계가 무장 중이다. 유럽연합(EU)을 필두로 무기 자급자족에 눈을 돌리는 ‘방산 내셔널리즘’이 번지고 있다. 가성비와 납기 경쟁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이제 막 걸음을 떼기 시작한 K-방산은 자칫 성장세를 꺾일 수 있는 위험에 직면했다. K-방산이 직면한 외부 견제 현실을 진단하고, 이를 넘어설 ‘다음 수출 전략’을 모색하고자 한다.
과거 방위산업은 전통적인 군사 동맹에 기반해 발전해왔다. 그러나 최근 각국은 공급망 불안과 자국 산업 보호 필요성에 따라 ‘자국 우선’ 전략을 강화하는 추세다. 동맹국이라도 위기 상황에선 무기 거래를 제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이러한 흐름을 가속시켰다. 이에 맞춰 국내 방산업계도 완제품 수출을 넘어 현지화 전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12일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방위비 지출은 2조7180억 달러로 냉전 종식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최근 10년 동안 37% 증가하며 방산 시장도 빠르게 성장했지만, 미국의 ‘바이 아메리카’, 유럽연합(EU)의 ‘바이 유러피언’ 등 역내 생산 우대 규정이 새로운 진입 장벽으로 떠올랐다. 현지 기업과의 협력, 기술 이전, 공동 생산 등이 사실상 수출의 필수 조건이 됐다.

지난달 현대로템이 폴란드와 체결한 K2 전차 2차 계약은 이러한 수출 환경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공급 물량은 180대로 1차와 동일하지만 생산 조건이 달라졌다. 117대는 현대로템이, 63대는 폴란드 방산업체 PGZ 현지에서 생산한다. 이를 위한 생산시설 구축과 기술 이전도 계약에 포함됐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현지화 전략에 가장 적극적이다. 최근 약 6000억 원을 투자해 폴란드 최대 방산기업 WB그룹과 합작법인을 설립하고, 향후 공급할 80㎞급 천무 유도탄을 현지에서 생산하기로 했다. 또 루마니아 남부에 생산공장을 건설해 2027년부터 K9 자주포와 K10 탄약운반차 등을 루마니아군에 공급할 계획이다. 호주에 이은 두 번째 해외 생산기지다.
일찍이 현지화 전략을 펴온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터키(2007년)와 페루(2012년)에 KT-1 기본훈련기를 수출할 때 일부 물량을 현지에서 조립했다. 지난해 7월에는 페루 국영 방산업체 세만과 FA-50, KF-21의 부품 공동 생산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하며 협력 범위를 넓혔다. 폴란드와의 FA-50 48대 수출 계약에는 유지ㆍ보수ㆍ정비(MRO) 센터 설립과 단계적인 현지 생산 능력 확보 계획이 포함됐다.
LIG넥스원도 6월 인도네시아 국영 방산업체 PT.DI와 ‘무기체계 생산·판매 협력’ MOU를 맺고, 정밀 유도 무기와 감시 정찰 장비를 중심으로 공동 프로모션과 향후 현지 생산 협력을 추진하기로 했다. 2023년에는 루마니아 국영 방산기업 롬암과 대공미사일 분야 현지 생산, 기술 이전, 공동 개발 등의 협력 기반을 마련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이 2035년까지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5%로 확대하기로 합의했지만, 유럽 내 생산능력이 부족한 점을 고려하면 국내 방산업체들의 경쟁우위는 당분간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단순 수출에 의존하기보단 현지 생산, 기술 이전, MRO 등을 아우르는 ‘장기 파트너십’ 전략을 통해 역내 공급망에 진입하고, 안정적인 수익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정아 한국무역협회 통상연구실 수석연구원은 “우리나라는 대규모 수출 계약 성과에도 불구하고 가격 경쟁력 중심의 전략에 머물러 있고 기술 이전, 현지 생산, 금융지원 등 복합적인 협상 의제에 대한 대응이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우방국과 수출 통제 완화, 공급망·기술 협력을 위한 ‘국가 간 기술산업기반협의체(NTIB)’ 등 전략적 협력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