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뒷받침 없으면 복지삭감 불가피

‘트럼프 달래기에 성공한 정상회담.’ 6월 2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담의 평가다.
참석하는 전용기 안에서조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유럽 동맹국들이 침략을 받았을 경우 미국이 개입할 것이냐에 대해 즉답을 피했다. 이들의 국방비 지출 비중이 너무 낮다며 계속해서 맹비난해 왔기 때문이다. 유럽 동맹국들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3.5%를 무기 구입과 병력 증원, 나머지 1.5%는 철도와 교량 건설 등 국방관련 인프라 투자를 공약하자 미 대통령은 마지못해 안보 공약을 재확인했다.
한숨 돌린 유럽연합(EU) 27개국은 유로화 단일채권을 발행해 무기의 공동구매 등을 지원하고 국방비도 점진적으로 증액한다. 하지만 경제성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국방비 증액에 따른 복지 삭감 등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지난 3월 EU의 행정부 역할을 하는 집행위원회는 앞으로 5년간 8000억 유로, 약 1300조 원을 국방비에 추가 지출한다고 밝혔다. EU 27개 회원국 가운데 20개 나라는 단일화폐 유로를 사용 중이다. 유로존 회원국들은 재정적자가 GDP의 3%를 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국방비 지출은 예외를 적용하기로 합의했다. 나토 합의대로 회원국들이 국방비를 1.5%포인트 더 지출하면 앞으로 5년간 6500억 유로가 국방을 위해 쓰인다. 국방비 증액은 회원국들이 중심이 돼 이뤄지며 EU 차원에서 중복 지출이나 투자가 안 되게 상호조정한다.
나머지 1500억 유로, 약 240조 원은 유로화 단일채권을 발행해 조달하기로 5월 말에 합의가 됐다. 유로존 20개 회원국이 유로 국채를 발행하지만 유로존 경제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최대 경제대국 독일이 발행하는 유로화 채권 금리가 제일 낮고 기관투자가들이 선호한다. EU 회원국들은 최근 몇 년간 1% 안팎의 낮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코로나 19 대처에 많은 재정을 풀었다. 따라서 정부의 돈주머니가 헐렁하기에 EU 차원에서 단일채권을 발행해 회원국의 국방비 증액을 지원한다.
집행위원회가 국제자금시장에서 최우량 등급의 신용을 바탕으로 30년 만기 유로채권을 발행할 예정이다. 최소 2개 이상의 유럽연합 회원국이 무기를 공동구매할 경우 이 자금에서 대출받을 수 있다. 회원국 공동의 방공망과 미사일 구입, 사이버전 대비, 드론전과 반드론전 등 대비에 지원된다. 2020년 코로나19 때에도 8000억 유로의 단일채권이 발행됐다. 국방비 증액을 위해 이번에도 단일채권이 발행되기에 유럽 차원의 재정통합이 한걸음 더 진전된다는 의미가 있다.
공동구매 지원 때 ‘유럽산’ 무기가 우선이다. 무엇을 유럽산으로 규정할 것인가는 현재 논의가 진행 중이다. 부품 가치의 최소 65%가 EU 27개국과 우크라이나, 아이슬란드, 리히텐슈타인, 노르웨이, 스위스, 영국의 방산기업이 생산해야 하는 식으로 정해졌다. 역외국(비EU 회원국) 방산기업들이 생산한 무기의 경우 원칙은 구매 가격의 최대 35%까지만 가능하다. 단 EU와 방위협정을 체결하고 별도의 기술협정을 체결하면 이 비중이 더 올라갈 수 있다.
미국의 의존도를 줄인다는 유럽의 자율성을 줄기차게 강조해온 프랑스는 유럽산 규정에서 부품가치를 70%, 구매 가격은 30% 정도로 더 낮추려 했으나 비회원국과 방산협력이 많은 독일이나 이탈리아, 폴란드가 반대해 계속 논의 중이다. 국내 방산업체의 경우 폴란드에 약 9조 원 상당의 K-2 전차를 판매해 현지에서 공장도 짓고 기술을 이전한다. 앞으로 ‘바이 유러피언’에 대응하려면 현지 투자를 늘릴 수밖에 없다.

EU의 ‘바이 유러피언’ 조항은 미국과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 나토 유럽 동맹국들은 2020~2024년 수입 무기의 64%를 미국에서 사왔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한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이고 합동훈련 등에서 무기의 상호운용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전의 5년과 비교해 12%포인트나 미국산 무기 구입이 증가했다. 2022년 2월 말에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유럽 국가들은 미국산 무기를 구매해 우크라이나를 지원해왔다.
트럼프 행정부가 점차 유럽에 주둔한 미군의 비중을 줄이고 동맹국들에 더 많은 방위부담을 지울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유럽산 무기 우선은 유럽에서 볼 때 당연하다. 하지만 단기적인 경제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트럼프는 유럽이 국방비를 대폭 증액하는데 미국산 무기를 덜 구매한다면 가만있을 리가 없다. 미 대통령은 큰 폭의 대미 무역흑자를 기록 중인 EU가 미국을 사기 쳤다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유럽연합을 맹비난해 왔다. 지난달 27일 관세분쟁 타결에서도 EU의 미국 무기 구입이 포함됐다.
또 하나는 버터와 총의 상충관계다. 정부 예산은 한정돼 있기에 국방비를 증액하면 먹고사는 버터 구매(복지)는 축소할 수밖에 없다. 물론 경제가 급성장한다면 이런 상충관계를 줄일 수 있겠지만 EU의 경제성장률은 1% 내외로 미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프랑스의 재정적자는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GDP의 5.8%를 기록했다. 지난달 중순 의회에 제출한 예산 초안의 경우 국방비는 35억 유로, 약 5조 원 증액됐으나 50억 유로의 건강보험료 지출이 삭감됐다.
마크롱 대통령의 여당은 의회에서 과반을 확보하지 못했다. 중도좌파 사회당을 비롯해 극우 국민연합 등 대부분의 야당이 건보료 삭감과 같은 복지 축소에 반대한다. 앞으로 예산안 결정 과정에서 상당한 논란이 예상되고 최악의 경우 프랑수아 바이루 총리가 불신임당할 수 있다. 작년 프랑스에서는 4명의 총리가 교체됐다. 그 해 7월 의회선거에서 여당이 과반을 상실하면서 야당이 총리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다.
스페인도 유사하다. 나토 정상회담에서 스페인의 페드로 산체스 총리는 5%의 국방비 증액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그는 러시아로부터 안보 위협을 그다지 느끼지 않는데 왜 교육과 복지를 삭감해 국방비에 더 지출해야 하냐고 반문했다. 트럼프는 우리가 부담하는 주한미군 주둔 비용의 9배 증액을 요구했다. 저성장 속에서 불가피한 국방비 증액은 우리에게도 복지 삭감으로 다가온다. 버터와 총의 상충관계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대구대 교수(국제정치학)
‘하룻밤에 읽는 독일사’ 저자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