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주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미국 인공지능(AI)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의 시가총액이 4조 달러를 돌파한 건데요. 전 세계 기업 가운데 '최초'의 일이었습니다.
9일(현지시간) 엔비디아는 장중 첫 4조 달러를 돌파한 데 이어 10일에는 종가로도 4조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여기엔 엔비디아가 수개월 수출이 막혔던 중국 시장에 다시 진출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되는데요. 사상 최고치를 연일 경신한 만큼 14일엔 고점 부담에 소폭 조정이 나왔지만, 시총 4조 달러 선은 지켰죠.
반면 마이크로소프트(MS)와 애플은 씁쓸함을 삼켜야 했습니다. 세계 최대 소프트웨어 업체 MS는 엔비디아와 함께 시총 4조 달러 돌파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고요. 애플은 가장 먼저 3조 달러 시대를 연 바 있습니다. 다만 두 기업은 '시총 4조 달러' 타이틀은 엔비디아에 내줘야 했죠.
특히 애플은 최근 이런저런 비판을 피하지 못하면서 눈길을 끌고 있는데요. '혁신의 아이콘'으로 불리던 기업이 심지어 '뒤처졌다'는 뼈아픈 비판까지 듣는 상황입니다.

애플과 MS, 엔비디아, 알파벳, 아마존, 메타, 그리고 테슬라. 이들 7개 기업의 주식은 시장 지배력과 기술 혁신으로 미국 증시를 대표하며 매그니피센트7, 줄여서 M7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최근 이들 종목을 바라보는 시선에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특히 테슬라, 애플에 대한 목소리가 심상치 않은데요. 테슬라, 애플 주가가 연초 대비 현재 각각 6%, 15%가량 하락하는 등 부진한 흐름을 보이자 일각에서 이들 기업을 이제 M7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겁니다.
미국 경제매체 마켓워치는 13일 컬럼비아 셀리그먼 글로벌 테크놀로지 펀드의 비말 파텔 매니저가 애플과 테슬라를 M7에서 빼는 대신 오라클과 브로드컴을 추천했다고 전했습니다. 테슬라에 대해서는 전기차 산업에서 기존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물론 중국의 신흥 업체들과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며 그 결과 매출 성장이 둔화하고 가격 인하 압력으로 수익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고요. 애플은 충성도 높은 팬층을 보유하고 있지만 고객들이 아이폰 업그레이드에 대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데다가 중국에 치중된 생산시설로 인해 지정학적 위험에도 노출돼 있다는 지적입니다.
올해 들어 애플은 M7 가운데 가장 부진한 주가 흐름을 보였습니다. 최근에는 서학개미들이 애플을 비롯한 M7에서 타 종목으로 대거 갈아탄 움직임이 포착됐는데요. 15일(한국시간)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이달 1~14일 서학개미의 순매수 1위 종목은 상장지수펀드(ETF)를 제외하면 AI 방산기업 팔란티어로 나타났습니다. 2위는 서클, 3위는 코인베이스로 나타났는데요. 같은 기간 순매수 상위 20위 내에는 M7 가운데 메타만이 이름을 올렸을 뿐입니다.
이는 이번 주(14일~18일) 미국 하원이 '가상자산 3법' 논의를 시작하면서 가상자산이 제도권에 본격적으로 들어올 것이란 기대감이 커진 영향으로 풀이됩니다. 미 하원은 이번 주를 '크립토 위크'로 지정하고 가상자산 시장 구조 법안(CLARITY Act), 스테이블코인 규제법(GENIUS Act), 중앙은행 가상자산 감시 중단법(Anti-CBDC Act) 등을 논의하죠.

애플은 2022년 1월 장중 시총 3조 달러를 처음 달성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3조1000억 달러 수준에 머물러 있는데요. 애플이 종가 기준 시총 3조 달러를 처음 돌파했던 2023년 6월 당시 엔비디아의 시총은 1조 달러에 불과했다는 걸 감안하면 판세가 온전히 뒤바뀐 셈입니다.
업계에서는 엔비디아의 시총 4억 달러 돌파와 함께 애플이 혁신 DNA를 잃은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내놓고 있습니다. 엔비디아는 AI 열풍을 타고 가파른 상승세를 기록하는 반면 애플은 음성 비서 서비스인 시리에 AI 기능을 탑재하는 데조차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지적이죠.
실로 애플은 지난해 6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자사 최대 연례 개발자 행사 '세계개발자회의(WWDC)'에서 떠들썩하게 새 시리를 공개했습니다. 자사의 AI 플랫폼 애플 인텔리전스를 기반으로 진화한 새 시리의 핵심은 대거 탑재된 AI 기능이었는데요. 개인 맞춤형, 앱 간 자유로운 연동, 더욱 강력해진 프라이버시 설계 등이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이 기술이 완성되지 못했다는 겁니다. 애초 지난해 가을 출시 예정이었던 기능들은 올해 봄으로 연기되더니 끝내 내년까지 연기됐는데요. 기술 공개 지연의 주원인은 기술적 한계였습니다. 이에 애플이 올해 놓을 것으로 예상됐던 스마트홈 허브 출시도 미뤄졌는데요. 스마트홈 제품은 음성 비서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시리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그런데 애플 인텔리전스 기반 시리의 품질 문제가 발생, 스마트홈 허브 출시도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은 겁니다.
WWDC는 매년 6월 열리는데요. 지난달 열린 WWDC 현장 분위기도 녹록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크레이그 페더리기 애플 소프트웨어 수석 부사장조차 새 시리에 대해 "제품으로 출시할 만큼 안정적이지 않다"며 "생각한 시간 안에 신뢰도 달성하지 못했다"고 인정했고요. 각종 매체 인터뷰에 나선 애플 임원들도 시리에 대한 해명을 이어갔습니다.
월가에서는 "애플이 AI 경쟁에서 뒤처졌다"는 분석이 빈번히 등장합니다. 삼성전자만 보더라도 구글 제미나이를 탑재한 갤럭시 AI를 지난해 갤럭시S24 시리즈에 본격 도입, 온디바이스는 물론 클라우드 AI를 병행해 활용하며 AI 스마트폰 시장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이미지 요약, 실시간 통번역 등에서 월등한 성능을 자랑 중이죠.
반면 애플은 오랜 시간 온디바이스 처리, 자체 생태계, 데이터 독립성을 고수해왔습니다. 아이폰 유저들에게도 '폐쇄성'이라는 애플의 특징은 잘 알려져 있을 텐데요. 자사 제품에서 데이터를 처리해 오면서 개인정보 보호엔 강점이 있지만, 요즘처럼 대규모 연산에 실시간 정보가 요구되는 생성형 AI 시대엔 속도, 그리고 디테일 부분에서 불리하다는 한계가 있죠.
이 같은 구조적 한계로 애플이 외부 AI 기술을 도입할 것이라는 의견에도 힘이 실렸습니다. 생성형 AI 강자 오픈AI나 엔트로픽 등과의 협업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이미 애플은 애플 인텔리전스의 일부 기능에 오픈AI의 기술을 제한적으로 적용하고 있기도 하죠. iOS 18부터는 사용자가 시리를 호출하고 비교적 복잡한 질문을 던졌을 때 시리가 아닌 챗GPT가 답변을 하는 방식이 도입됐는데요. 다만 시리 자체는 여전히 애플의 자체 모델 기반으로 작동하는 중입니다. 이번에 고려하는 협업은 이 같은 구조를 아예 외부 AI로 전환하는 게 골자죠.

최근 애플이 직면한 문제는 한두 개가 아닙니다. 유럽 시장에서의 5억 유로 과징금 소송,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카드, 인력 이탈 등을 거론할 수 있는데요. 무엇보다 투자자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긴 건 제대로 된 AI 기능을 내놓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투자자들 사이에선 기존 보수적 경영 기조를 전환하고 대규모 인수·인재 영입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는 압박이 커지고 있죠.
14일(현지시간)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시티그룹의 아티프 말리크 분석가는 "애플은 그동안 대형 인수합병을 거의 하지 않았다. 마지막 큰 규모의 인수는 2014년 비츠(Beats) 인수였다"며 "하지만 애플이 기존의 AI 강자 기업을 인수하거나 주요 지분에 투자한다면 투자자들의 시각은 더 긍정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최근 애플은 퍼플렉시티AI 인수를 내부적으로 검토한 것으로도 알려졌는데요. 오랜 기간 애플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여 온 웨드부시증권의 댄 아이브스 분석가는 퍼플렉시티 인수를 "당연한 수순"이라며 "애플이 300억 달러를 쓴다 해도 AI에서 얻을 수 있는 수익 기회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준"이라고 바라봤죠.
여기에 팀 쿡 최고경영자(CEO) 교체를 포함한 쇄신이 필요하다는 일갈도 나왔습니다. 시장 분석기관 라이트셰드 파트너스는 최근 투자자 메모에서 "쿡의 교체까지 포함된 경영진 교체가 지금 애플에 필요한 바로 그것"이라며 "AI에서 실패한다면 회사의 장기 성장 가능성과 방향 자체가 근본적으로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했고요. 미 컨설팅 기업 워터타워 리서치의 폴 믹스 수석 분석가는 경영진 교체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애플이 대담한 조처를 해야 한다"며 "AI 역량 강화뿐만 아니라, 애플이 변화하고 있다는 신호를 시장에 보내기 위해서라도 대규모 인수가 필요하다고, 애플 혼자 힘으로 AI를 해내긴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올해 3월 말 기준 애플의 현금 및 유동 자산은 1330억 달러로, 인력 충원 등 AI 분야에서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가고 있는 메타의 약 두 배에 달하는데요. 자본을 활용한 인수·제휴 확대가 가능하지만 실제 실행 여부는 확언할 수 없는 상황. 그동안 애플이 수직 통합과 자체 개발을 중시해 온 만큼 외부 기업에 대한 의존을 늘리는 결정은 전략적 전환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애플의 AI 전략은 기술뿐 아니라 경영 기조 전반을 아우르는 재정비가 필요한 국면에 들어섰는데요. 단기적으론 외부 모델 도입과 협업을 통해 실질적인 기능 개선이 이뤄질 수 있겠지만, 중장기적으로는 AI 생태계 내 존재감을 회복할 수 있는 독자적 역량 확보가 필수적입니다. 혁신의 아이콘이라는 시장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애플이 어떤 선택을 내릴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