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의 헌법이 사회질서를 세우는 근간이라면, 상법은 기업 활동의 기본 규범이다. 상법은 기업의 설립, 운영, 지배구조를 규율하며 경제의 예측 가능성을 제공한다. 급변하는 디지털 경제와 글로벌 시장에서 시대에 맞는 상법은 어찌보면 필수적일 수 있다. 다만, 급격한 법 개정은 기업에 큰 부담을 초래할 수 있다. 새로운 규제나 의무는 기업의 운영 비용과 적응 시간을 증가시킨다. 상법 개정을 점진적이고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기업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이고 국제 기준에 맞도록 법제를 개선하되, 기업의 안정성과 경제 활력을 위해 균형 잡힌 접근이 필요하다. 본지는 정부와 여당이 추진 중인 상법 개정이 기업의 활력과 사회적 신뢰를 뒷받침하는 초석이 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기획 시리즈를 연재한다. 상법의 현주소를 점검하고, 개정을 통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는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기업의 헌법'으로 불리는 상법을 바꾸는 작업에 정부와 여당이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기업이사에게 '주주 전체에 대한 충실의무'를 법적으로 부여하고, 이사 선임부터 의사결정 구조까지 대주주의 영향력을 줄이는 제도들이 법제화된다. 정부,여당은 이를 통해 자본시장 신뢰를 회복하고 코스피 5000 시대를 견인할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경영 자율성과 기업가 정신을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가 경제계 안팎에서 거세다. 주주 권리 확대와 기업 책임 강화, 그 경계선에서 '상법 대개편'의 기로가 시작됐다.
30일 정치권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은 6월 임시국회가 끝나는 7월 4일 전까지 상법 개정안을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르면 3일 처리도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이번 개정안의 핵심은 이사의 충실의무 범위를 기존 ‘회사’에서 ‘회사와 주주 전체’로 확대하자는 것이다. 이사가 회사뿐 아니라 주주의 이익도 함께 고려하도록 법적 책임을 명확히 하겠다는 취지다. 아울러 △전자 주주총회 도입 △대규모 상장회사 이사 선임 과정에서 집중 투표제 도입 △분리선출 감사위원의 이사 수 확대 등도 함께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여당은 이를 통해 ‘거수기 이사회’를 ‘책임지는 이사회’로 전환하고, 기업지배구조 전반의 투명성을 높이겠다는 구상이다.
민주당은 앞서 3월 일부 조항이 포함된 개정안을 국회 본회의에 상정했지만 당시 윤석열 대통령의 제동으로 무산된 바 있다. 당시 윤 대통령은 “시장 혼란과 경영권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고, 이후 법안은 폐기됐다.
개정안이 다시 추진되자, 재계는 기존 우려가 해소되지 않았다며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재계는 이번 개정안이 기업 경영의 유연성을 해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특히 집중투표제 의무화나 감사위원 분리 선출 조항은 일부 외국계 행동주의 펀드가 경영권에 개입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계 한 관계자는 "주주 권리를 확대한다는 취지엔 공감하지만, 자칫 단기 이익 중심의 경영 압박이 커질 수 있다"며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자본시장 선진화를 위해 상법 개정이 불가피하며, 조속한 시행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에 민주당은 이날 상법개정안 처리에 앞서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제인협회, 한국경영자총협회,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등 경제 6단체를 만나 설득에 나서기도 했다.
진성준 민주당 정책위원장은 "상법이 개정되면 우리 주식시장이 다시 한번 뛰어오르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우리 자본시장 선진화를 위해 이제는 혹시 발생할지 모를 부작용을 해소해 나가는데 지혜와 힘을 모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재계가 우려하는 지점에 대해서는 보완 입법이나 시행령 조정 등을 통해 시장 혼란을 최소화하겠다는 입장도 내놨다.
기업들은 걱정이 크다. 재계는 이날 간담회에서 '경영 판단 원칙(경영자가 의무를 다하며 선의로 경영상 판단을 했다면 손해가 발생해도 개인적인 책임을 묻지 않는 원칙)' 명문화 등을 요청했다. 법 개정이 불가피하다면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도 제도적으로 명확히 마련해 달라는 요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