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신용등급 강등은 호텔, 석유화학, 이차전지 업종으로 집중됐다. 국내 신용평가 3사(한국기업평가, NICE신용평가, 한국신용평가)는 올해 들어 총 70여 건의 신용등급 하향을 발표했는데, 이 중 상당수가 금리 인하에 따른 경기 성장률 훈풍에도 불구하고 예상보다 실적 회복이 지연되는 업종의 기업들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호텔신라(AA-)다. 삼성그룹의 소속 호텔 계열사로 비교적 우수한 시장 지위와 AA등급 대를 유지해오던 호텔신라는 면세 부문의 사업 환경 저하와 차입 부담 확대로 신용등급 전망이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됐다. 면세 부문은 작년 2분기 이후 중국 경기 둔화와 고환율로 인한 가격 경쟁력 저하 등의 영향으로 영업적자를 지속했다. 이익창출력은 떨어지는 반면, 차입부담은 증가세다. 작년 말 호텔신라의 연결 순차입금은 전년 대비 960억 원 증가한 1조2546억 원이다. 인천공항 면세점에 334억 원 투자, HDC신라면세점 유상증자 참여 등 자금 소요로 인한 차입이 늘어난 결과다.
AA급으로 우량 신용도를 보유하고 있던 석유화학 기업들도 A급으로의 강등 위기에 놓였다. 한화토탈에너지스와 에스케이지오센트릭의 신용등급은 ‘AA-, 부정적’으로 떨어졌다. 중국의 경제성장률 둔화, 닞은 정제마진, 국제유가 하락에 따른 수요 약세 등 비우호적인 수급 상황이 맞물리면서 수익성 회복이 더뎌졌기 때문이다. 한신평은 “최근 지정학적 이슈로 유가 및 정제마진 변동성이 확대되고 있어 하반기 수익성 개선 여부 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HD현대케미칼(A, 안정적→부정적), 평택에너지앤파워(A, 긍정적→안정적)도 ‘A-’ 등급으로의 하향 가능성이 커졌다. 특히, HD현대케미칼은 지난해 3분기부터 적자를 지속하고 있다. 주주간 계약에 따라 롯데케미칼과 HD현대오일뱅크를 주요 고객으로 확보해 영업 안정성이 우수했는데도, 이들 고객이 석유화학 업황 악화로 이익을 내지 못하면서 HD현대케미칼의 이익 창출력도 동반 저하되는 추세다. 한국신용평가는 에스케이어드밴스드의 신용등급을 직전 ‘A-, 부정적’에서 ‘BBB+, 부정적’으로 단숨에 3 노치(notch) 넘게 끌어내렸다. 에스케이어드밴스드는 지난해 12월 신용등급이 ‘A’에서 ‘A-’로 강등된지 4개월 만에 ‘부정적’ 신용등급 전망을 단 바 있다. 중국의 대규모 PDH설비 증설로 공급과잉 기조에 놓이는 등 프로필렌 업황 부진이 장기화하며 영업적자가 4년째 지속됐다.
이처럼 석유화학 업황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가운데 글로벌 신용평가업계도 국내 석유화학 업계의 불황이 장기화할 가능성을 경고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스탠다드앤푸어스(S&P) 글로벌은 지난달 ‘더 깊은 하락 사이클에 직면한 한국 석유화학 기업들’ 제목의 보고서를 내고 한국 석유화학 기업들의 업황 하락 사이클이 최소 2년 이상 지속해 추가 신용등급 하방 압력이 높다고 전망했다. 김태희 S&P글로벌 연구원은 “2022년 말 시작된 하락 사이클이 아직 뚜렷한 회복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번 하락 국면은 향후 2년 내 벗어나기에는 너무 깊은 수준”으로 평가했다. 이에 따라, S&P가 등급을 부여한 한화토탈에너지스(BBB), LG화학(BBB+), SK이노베이션(BBB-) 등 국내 주요 석유화학 기업들의 신용등급 유지 여력도 제한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전기차 전환 지연으로 성장세가 둔화한 이차전지 기업들은 그야말로 ‘줄 강등’이 벌어졌다. LG에너지솔루션, LG화학의 신용등급은 ‘AA+, 부정적’으로 강등됐고, SK아이이테크놀로지, 에코프로, 에코프로비엠도 ‘A, 부정적’으로 떨어졌다. 국내 이차전지 소재 기업들의 경우 미국 내 생산 비중이 작아 미국발 관세 부과의 부담도 커질 수 있다. 신용평가업계에서는 올해 상반기에 신용등급 상향 기업 수가 더 많았지만, ‘하향 기업의 질’이 더 무겁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A등급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단순히 등급이 낮아졌다는 의미를 넘어, 한국 산업 전반의 구조적 경쟁력, 수익성 회복에 균열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신호로 해석하고 있다.
기업들은 신용등급 하락에 따른 시장 리스크를 체감하고 있다. 신용등급이 내려갈 경우, ‘신용도 저하→발행금리 상승→자금난 심화→신용도 추가 하향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나타나는 것은 물론, 내부 투자 가이드라인에 영향을 받아 기관투자자들의 투자가 제한될 수 있다. 이 경우 자금조달 계획에 차질을 빚거나 유동성 위기를 겪으며, 악순환이 심화할 우려가 크다. 상반기 신용등급이 강등된 롯데건설은 최근 회사채 수요예측에서 미매각 사태를 피하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