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 21세기 책봉사

입력 2025-05-1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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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경제부 부장

중국의 명·청나라 시절 ‘책봉사(冊封使)’가 있었습니다. 황제의 특사 가운데 하나였지요. 주변 소국에서 새로운 군주나 왕이 결정되면 또는 왕의 뒤를 이를 세자가 책봉되면 중국이 이를 승인하곤 했는데요. 황제의 명을 받은 특사가 이들을 찾아가 왕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고는 했습니다.

역사서를 읽어 내려갈 때마다 요즘 기준으로 이해가 어려운 제도와 관습이 수두룩합니다. 맹목적인 사대의식도 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시대 중국은 아시아에서 정치 군사적으로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주변국은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왕정의 존속과 경제·외교적 이익을 위해 전통적인 국제질서를 따라야 했지요.

명·청에 조공을 보내며 이를 바탕으로 조공 무역이 이뤄지기도 했습니다. 조공의 순기능은 지속적인 무역의 역할이었습니다. 이런 조공 외교를 두고 ‘자주 의식의 결여’라며 무턱대고 폄훼하기는 어렵습니다.

책봉 역시 마찬가지이지요. 단순하게 “우리나라 왕인데 왜 중국에 승인을 받아야 하느냐”고 따질 일은 아닙니다. 왕이 즉위하고 책봉을 받으면 명·청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은 다른 국가에서도 인정을 받는 방식이었으니까요.

여기에 음해와 반란이 들끓었던 과거 사대의식은 왕실의 안정과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한 과정 가운데 하나로 여겼을 테지요. 나아가 안보까지 보장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

책봉사의 영향력은 비단 조선만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물론 류큐 왕국과 멀게는 베트남까지 이어졌지요.

그 옛날 역사 속에만 머물렀을 듯한 책봉은 공교롭게도 20세기 근현대사에도 존재합니다. 한국전쟁 이후 쿠데타로 정권을 틀어쥔 군부정권이 특히 그랬습니다.

1961년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세력이 정국혼란 수습과 부정부패 척결 등의 명분을 내세워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장면 내각을 무너트리고 군사정권을 수립했는데요. 이승만 하야(4·19 혁명) 후 출범한 장면 정부가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지 못한 채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점도 군부의 개입 명분으로 작용했습니다.

12·12 군사 정변은 또 어떤가요. 1979년 전두환 소장,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이 박정희 사망 이후 정권 주도권 확보하기 위해 군 지휘권을 장악하고 이를 앞세워 군과 정부의 실권을 장착했습니다.

국민의 손으로 선출된 적이 없는 이들 군부 권력은 정권 출범 이후 백악관을 찾아가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정권으로서 인정을 받는 모양새였을 테니까요. 국민에게 선택받지 못한 이들은 미국 행정부를 통해 정권의 당위성을 강조했습니다. 형태만 달라졌을 뿐 중국 황제의 특사를 통해 왕정의 정통과 지속성을 인정받으려 했던 조선 시대와 다를 게 없었던 셈이지요.

그러나 사실상 국가 권력의 공백기에 빠진 지금은 책봉사를 받고 조공 외교를 하던 옛날보다 더 심각한 것 같습니다. 국제무대에서 추락한 대한민국의 위상은 차치하더라도 리더십의 부재로 인해 ‘코리아 패싱’이 불 보듯 일어나는데 누구 하나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기 어렵습니다.

사실 한국만 아니라 전 세계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 이후 일대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개의 전쟁과 미국발 관세 폭풍 속에서도 외교역량을 충분히 발휘하는 국가도 있습니다. 베트남은 ‘균형외교(Hedging Strategy)’와 다자주의를 앞세워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습니다. 러시아와 미국 대통령을 잇달아 만나며 친분을 과시하면서 중간에서 이익을 추구하고 관세 피해를 최소화하려 합니다.

인도는 또 어떤가요. 인도의 외교 핵심은 ‘전략적 자율성(Strategic Autonomy)’입니다.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를 찾아가 종전을 촉구하고 비난하더니 뒤로는 러시아의 값싼 원유를 사들이기 시작합니다. 외교의 기본인 철저한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것이지요.

이제 21대 대통령 선거가 보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새 정부는 정치적 혼란에서 비롯돼 추락한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을 다시 일으켜야 할 숙명을 지녔습니다. 나아가 두 개로 쪼개진 글로벌 양극화 시대 속에서 어느 국가와 마주 서더라도 ‘국민이 뽑은 권력의 당위성’을 앞세워 할 말을 하는 국가로서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어서 이 혼란을 수습하고 베트남이나 인도처럼 우리의 외교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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