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행정부의 관세 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글로벌 빅파마들이 미국 내 투자를 늘리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약가 인하 정책에 반발해 미국 내 투자 계획을 재고하는 제약사가 나타났다.
16일 업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12일(현지시간) 처방약과 의약품 가격을 타국과 동일한 수준으로 인하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기 행정부 시절부터 미국 환자들이 다른 나라보다 높은 약가를 부담하고 있다며 제약사들의 가격 정책을 비판해왔다.
이번 행정명령은 향후 30일 이내 제약사들이 정부가 설정한 목표 약가에 대해 자발적 인하 계획을 제출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해당 기업이 6개월 이내에 진전을 이루지 못하면 규칙 제정과 강제 조치에 돌입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스위스 제약사 로슈는 “이 행정명령이 발효될 경우 우리가 이전에 발표했던 미국 투자 계획에 자금을 지원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세계 최고의 제약 및 의료 생태계인 미국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경제 성장을 저해하며 미국 내 일자리 감소로 이어질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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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슈는 지난달 미국 현지 생산과 연구개발(R&D) 인프라 확충을 위해 향후 5년간 미국에 500억 달러(약 71조 원)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해당 투자는 건설 일자리 6500개를 포함해 총 1만2000개의 신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이번 행정명령에 따라 해당 투자 계획을 축소하거나 철회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미국제약협회(PhRMA)는 “이번 조치는 미국 환자와 근로자에게 불리한 거래가 될 것”이라며 “제약사들의 수천억 달러 투자를 위협할 것이다. 이는 일자리를 위협하고 경제를 침체시키며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더욱 높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앞서 글로벌 빅파마들은 미국의 관세 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연이어 미국 내 투자 계획을 공개했다. 존슨앤드존슨은 550억 달러(78조 원),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BMS)은 400억 달러(55조 원), 일라이 릴리 270억 달러(38조 원), 노바티스 230억 달러(32조 원) 등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들도 로슈와 같이 트럼프의 행정명령을 우려하는 메시지를 낼 가능성이 있다. 약가 인하의 주요 타깃이 고가의 오리지널 의약품을 판매하는 글로벌 빅파마와 처방약급여관리업체(PBM)일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이다. 백악관은 그간 제약회사들이 자사 제품을 할인해 해외 시장에 진출하고 그 할인금액은 미국에서 높은 약가를 통해 충당하고 있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이번 행정명령이 미칠 여파를 분석하는데 분주하다. 한국바이오협회는 “미국 정부 및 미국 제약사들이 한국 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를 대상으로 혁신의약품에 대한 약가 인상 요구가 커질 것”이라며 “미국 정부의 변화는 미국에 진출하려는 우리 신약개발 기업뿐만 아니라 바이오시밀러, 위탁개발생산(CDMO) 기업 모두에게 약가 책정 및 현지화 전략에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내 기업들에게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의견도 나온다.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은 전날 온라인 설명회를 통해 “미국 행정부의 약가 인하 정책이 국내 제약회사에 위기상황이라고 인식할 필요가 없다. 셀트리온 입장에서는 더 많은 기회가 올 것으로 생각해 기대감도 있다”고 말했다. 서 회장은 “전 세계에서 사보험 중심의 의료체계를 가지고 있는 곳은 미국이 유일하다. 중간 유통구조에 문제가 있어 환자에게 부담이 컸다”며 “셀트리온이 미국에 공급하는 바이오시밀러 가격은 유럽 대비 높지 않은 만큼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