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 책임 기준 모호
'상당한 주의 의무' 혼란
책무구조도 미공개

금융회사 고위 임원의 책임을 사전 문서화하는 책무구조도 법적 제출 의무를 갖춘 제도로 전환했다. 하지만 영국·호주 등 주요국처럼 구체적인 책임 기준과 공개 시스템 등 강력한 제재 체계를 갖춘 구조와 비교하면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이 적지 않다.
12일 금융투자 업계에 따르면 책무구조도는 주요 업무의 최종 책임자를 사전에 특정해 내부통제를 강화한다. 영국, 미국 등 주요국은 경영진의 책임을 법률로 명시하고 형사처분까지 가능하다. 한국도 지난해 7월 시행된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 개정에 따라 법적 제출 의무가 부과됐다. 임원은 책무구조도에 따라 자신이 맡은 영역에서 내부통제가 효과적으로 작동되도록 관리할 법적 책임을 진다.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상당한 주의의무’ 이행 여부를 기준으로 주의·경고·해임요구 등 신분상 제재가 가능해졌다.
영국은 2016년 고위경영자 인증제도(SMCR)를 도입해 각 임원의 업무와 의사결정 권한을 문서화한 ‘책임지도(Responsibility Map)’ 제출을 법으로 의무화했다. 영국 금융감독청(FCA)은 이를 기준으로 임원이 ‘합리적인 조치(reasonable steps)’를 다했는지 판단하며 위반 시 벌금·직무정지 등 법적 제재가 가능하다.
호주도 영국의 형식을 참고헤 2018년부터 은행 임원 책임성제도(BEAR) 제도를 도입했다. 현재는 금융책임체계(FAR)로 확대 시행 중이다. 책임지도 및 명세서 제출은 법률로 강제된다. 이행하지 않으면 과징금·임원 등록 취소·보너스 환수 등 강력한 제재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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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책임지도 제출 의무는 없지만 2002년 제정된 사베인스-옥슬리법(SOX법)에 따라 CEO와 CFO가 재무제표와 내부통제 체계의 적정성을 직접 서명하고, 허위 공시나 내부통제 실패 시 형사처분까지 받을 수 있다. 실질적으로 고위 경영진에게 가장 강한 법적 책임을 부과하는 구조다.
한국의 책무구조도는 영국과 호주처럼 책임 문서의 공개성과 제재 근거의 구체성이 동시에 확보된 제도와 비교하면 구조적 차이가 존재한다. 특히 한국은 문서 작성과 제출은 의무화했지만, 면책 또는 제재 기준이 추상적이다. 또 외부 공개도 이루어지지 않아 제도의 실효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금감원은 검사 및 제재 시 회사들이 제출한 책무구조도에 따라 실질 책임자를 특정하고 상당한 주의의무 이행 여부를 판단해 제재 수위를 결정한다.
문제는 상당한 주의의무가 애매하다는 점이다. 상당한 주의의 범위와 판단 기준에 대한 명확한 규정은 없다. 금감원은 '해당 임원이 실질적으로 책임을 맡고 있었고 경영진으로서 필요한 주의와 점검을 했는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는 원칙만 제시한 상태다. 상당한 주의의무의 해석이 불명확해 자칫 검사·제재 과정에서 자의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업계에서는 책임은 개인에게 명확히 귀속되는데 면책 요건은 불분명하다며 자의적 제재 가능성을 우려한다. 한 대형 증권사 관계자는 “법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주의의무가 검사관 판단에 따라 제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부담이 크다”며 “금감원이 사전 면책 기준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사후 책임 추적용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책무구조도가 금감원이 검사 결과에 따라 내부 판단에 기초해 책임 유무를 나누는 방식이어서 사후적 제재 정당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금감원은 책무구조도 도입 후 제재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중대성 검토심의위원회'를 설치해 운영하는 등 보완책을 마련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