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풍경] 알면서도 자초하는 병

입력 2025-04-01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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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철 안산유소아청소년과 원장

남미여행을 하면서 식사와 함께 삼바나 탱고처럼 남미의 대표적인 전통공연을 보여주는 라파인쇼를 볼 기회가 있었다. 공연장도 크고 관객들도 엄청났지만 그야말로 압도적인 것은 음식. 한 젓가락씩 맛을 본다 해도 반도 못 먹는 수많은 샐러드 요리, 원하는 부위를 원하는 양만큼 무제한으로 썰어주는 브라질 바비큐 요리인 슈하스코, 케이크가 이렇게 다양할 수 있음을 알게 해준 디저트 코너, 말 그대로 산해진미가 넘쳐났다. 아무리 먹어도 계속 채워놔 떨어질 줄 몰랐다.

먹고 배가 부르면 토한 후 다시 먹었다던 고대 로마인들의 연회가 이랬을까, 흥청망청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걸까. 뜬금없이 떠오른 것은 변사또 잔치에 어사 이몽룡이 지었다는 금준미주 천인혈(金樽美酒 千人血, 화려한 술잔에 담긴 좋은 술은 만백성의 피)이라는 시조였다. 힘들게 간 남미여행 맘껏 즐기면 그만인 것을, 평생에 한 번뿐일 라파인쇼 실컷 먹고 마시면 그만인 것을, 왜 이 시조가 떠오른 걸까.

오래전 소렌토에서 이탈리아 사람들이 가려고 했던 곳, 엄마 찾아 삼만리에서 마르코가 도착한 곳, 지금은 처지가 뒤바뀌어 ‘돌아오라 소렌토로’가 아니라 ‘돌아오라 라보카(La voca)로’를 불러야 하는 탱고 발상지, 부에노스아이레스 보카지구의 관광객들로 북적대는 컬러풀한 카미니토 거리와 철길을 넘어 들어가면 위험하다는 회색빛 빈민거주지 사이의 강렬한 대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라파인쇼는 정말 한 번뿐일까.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참석한 지인의 회갑기념 파티도, 동창회 모임도 질탕하게 먹고 마시고 남은 음식들로 어지러운 뒷모습이 라파인쇼와 같았다. 중세가 천연두 페스트 결핵 콜레라 같은 전염병의 시대라면, 현대는 비만 고지혈증 동맥경화 고혈압 당뇨병 같은 대사질환의 시대임을 절감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중세는 의학이 발달하지 못해 몰라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재난인데 반해, 현대는 알면서도 스스로 자초하는 병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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