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로] 삼성 몸집 10배 키운 ‘신경영 30년’

입력 2023-11-0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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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과제 직언하던 이건희 회장
3류행정이 기업 발목잡아 ‘일갈’
미래내다본 혜안이 변화 이끌어

지난달 경기도 포천에 있는 일동레이크 CC를 찾았다. 근 20년 만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특히 마운틴코스 2번 홀에는 이건희 회장의 이글 기념수가 있어 특별한 기억을 소환해 줬다. 1996년 7월 이건희 회장이 IOC 위원으로 선임되자 당시 전경련의 최종현 회장은 자신의 소유였던 일동레이크CC에 전경련 회장단을 초대해 축하모임을 열었다. 재계의 단합을 과시한 이 자리에서 이건희 회장이 이글을 하자 최 회장은 금장 퍼터를 선물로 주며 앞으로 삼성과 나라에 좋은 일이 있을 징조라며 크게 기뻐했다. 과연 그 이후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는 등 선진국으로 도약했고 삼성도 세계적 기업으로 컸다.

1996년은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을 선포한 지 3년이 되는 해였다. 특유의 7·4제(7시 출근 4시 퇴근)가 임직원들의 생각과 행동에 변화를 일으켜 신경영이 정착돼 가던 때였다. 이 회장은 신경영의 성공이 나라와 사회에도 번져가기를 바랐다. 때마침 정부도 “세계화”를 국정지표로 삼아 일대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당시 권력 실세였던 최형우 내무부 장관이 이건희 회장에게 특별한 부탁을 해왔다. 전국의 고위공무원을 대상으로 신경영에 관한 강의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전경련의 조규하 부회장에게도 강의를 요청했다. 그만큼 재계도 개혁에 동참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당시 정부와 실무적 사항을 조율했던 필자는 이건희 회장의 강의를 용인의 삼성 연수원에서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강의가 신경영에서 정부의 경쟁력으로 넘어가면서 가슴이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취약한 정부 경쟁력이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당대의 실세 장관 앞에서 이래도 되나 싶었다. 그래도 이 회장은 거침이 없었다. 삼성의 영국 윈야드 전자레인지 제조공장 예를 들면서 땅값도 너무 비싸고 공무원의 수준도, 기업을 대하는 태도도 형편없다고 일갈했다. 세계화 시대는 같은 조건의 경쟁인데 우리의 국가적 인프라는 기업을 내쫓고 있다고 혹평했다. 물론 세계화 정책에 큰 기대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려 안도하며 강연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건희 회장만큼 기업인으로서 국가적 과제에 대해 솔직하게 의견을 개진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정주영 회장에게 비슷한 사례가 있다. 고위 공무원 상대의 강의에서 현대가 해외에서는 공사를 잘하는데 왜 국내에서는 부실 공사가 많냐는 질문이 있었다. 그러자 정 회장은 “당신네 같은 공무원들이 빼먹어서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답변했다. 당시 직접 강의를 들은 어느 공무원의 회고담이다. 그는 언짢았지만,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그랬기 때문이었다.

최종현 선경(지금의 SK) 회장도 기자회견에서 정부의 업종전문화와 소유분산 정책을 시대에 맞지 않는다며 비판한 적이 있었다. 격분한 청와대는 다음날 선경 경영기획실장(사장)을 불렀다. 면담 자리에는 선경그룹 은행채무현황이라는 자료가 있었다. 부도를 내버리겠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제2의 국제그룹 사태가 연상됐다. 최 회장은 할 수 없이 부총리를 찾아 사죄했다. 그만큼 권력은 오만했고 기업은 작았다.

이건희 회장은 할 말을 했다. 나라를 위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정치 4류, 행정 3류, 기업 2류” 발언은 정치 9단이라는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 회장은 귀국을 못하고 회사는 세무조사를 받았다. “경제정책이 낙제는 면한 것 같다”는 발언도 큰 파장을 불러일으켜 사과 비슷한 해명을 해야 했다. 그래도 동계 올림픽을 유치하는 등 나라를 위하는 일에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20년 만에 만난 일동레이크의 이글 기념수는 잘 관리되어 있었다. 그때는 카메라가 없어 찍을 수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삼성 갤럭시 폰으로 쉽게 기억을 저장할 수 있었다. 나무가 근 4배는 자란 듯했다. 1993년 28조 원이었던 삼성의 매출은 지난해 302조 원으로 10배나 더 자랐다. 그만큼 신경영이 만든 삼성의 변화는 자연의 속도보다 더 크고 빠르고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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