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희 칼럼] 그저 기다리기만 해서는 결코 오지 않을 어떤 기회

입력 2023-06-03 10:00 수정 2023-06-08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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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를 둔 이혼 부모의 면접교섭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임수희 수원지방·가정법원 안산지원 부장판사 칼럼

“난 아빠 만나고 싶지 않아요. 아빠도 (나에게) 오기 싫으면 오지 말라고 했어요.”

설마 했는데, 세진이를 만나 보니 정말로 세진이는 아빠 보기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세진이 아빠는 전부 엄마가 시켜서 그러는 거라 했지만 세진이의 말투나 표정을 보면 누가 시켜서 나올 수 있는 그것이 아니었어요. 진심으로 아빠를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세진이 아빠, 태일씨는 이혼한지 반년 만에 세진이가 그렇게 변한 것을 믿을 수 없어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껌딱지처럼 붙어 지냈고 함께 축구하는 걸 그렇게나 좋아하던 세진이가 아빠를 안 보겠다고 하다니.

“그럼 판사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세진이가 면접교섭이 불편한 것 같아서 편하게 해 주려고 ‘오고 싶을 때 오라’고 한 거지, ‘오지 말라’고 한 적은 없거든요. 분명 애 엄마가 시켰을 거예요.”

“판사님, 저 사람은 늘 저런 식이라니까요.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말해요. 저는 단 한 번도 세진이한테 아빠 만나지 말라고 한 적이 없어요. 시간도 자기 맘대로 정했다가 막 바꿨다가 그러니까 세진이도 싫어하죠. 그리고 세진이가 그러던걸요. 아빠가 막 화내면서 ‘너, 아빠 보기 싫으면 오지 마. 나도 너 안 봐.’라고 말했다고요.”

세진이 엄마, 혜정씨도 지지 않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습니다. 협의이혼 할 때 약속했던 면접교섭을 위해 세진이를 주말마다 아빠한테 보냈지만 두어 달 지나서는 아이도 싫어하고 그렇다고 태일씨에게서 연락이 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흐지부지 되어 한 네 달쯤 서로 안 보고 지나갔는데 갑자기 ‘면접교섭 청구서’라는 것이 날라 왔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세뇌’시켜서 아빠를 못 만나게 하고 있다고 쓰여 있는 그 청구서를 보고 혜정씨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처럼 격분했습니다.

6학년인 세진이는 사실, 초등학교 내내 아빠와 사이가 좋았습니다. 아빠와 축구하는 걸 제일 좋아했던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나 엄마와 아빠가 이혼한 후 6개월 만에 아빠를 미워하게 된 것 또한 슬프지만 사실입니다. 지금은 아빠를 만나고 싶지 않아 하는 것도 진심이었고요. 단, 표면적인 의사는요.

그럼 ‘속마음’은 다를 수도 있다는 말인데, 세진이가 속마음을 숨기고 표면적으로만 거짓말을 한다는 걸까요.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스스로는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모르고 있을 수 있으니까요. 세진이를 따로(부모와 분리하되 편안한 상담 환경에서) 만나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고(가능한 한 전문가인 가사조사관 등을 통해서), 세진이 엄마와 아빠를 만나 면담을 해 본 후에, 세진이를 아동상담가와 몇 회기 전문적인 방법으로 좀 더 깊이 이야기를 나눠 보니, 세진이가 아빠를 강력히 증오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어요.

하지만 그 이유는 오히려, 너무나 좋아하고 사랑하는 아빠가 엄마와 이혼한 것, 세진이와 헤어져서 따로 사는 것에 너무나 화가 나서였지요. 세진이는 이혼한 부모에게 ‘배신감을 느낀다’고 했어요. 부모의 이혼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고 아빠와 헤어져 살게 된 것이 너무나 슬펐던 세진이는 그 강력한 분노와 슬픔, 그리고 해결되지 않을 좌절감과 고통을 전부 아빠에 대한 비난과 증오하는 마음으로 쏟아냈던 것이었어요. 세진이에게도 부모의 이혼을 수용할 마음의 준비와 시간이 필요했던 거지요.

세진이와 같은 또래의 초등학교 고학년, 즉 아직 사춘기는 오기 전이지만 아주 어린 초등학생들보다는 사고, 언어, 사회성 등에서 비교적 성숙한 아이들의 경우, 위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부모의 이혼에 대해서 성인 수준의 설명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공감도 합니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알고요. 그런데 아직은 흑백논리 수준으로 단순화 시켜서 이해하는 정도의 인지 능력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잘잘못 문제로 쉽게 빠져서는 한쪽 부모를 혹독하게 비난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상황에 처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함께 사는 쪽의 부모를 비난할 수는 없기에 그 편에 서게 되기 쉽고, 반면에 모든 잘못과 비난할 것들은 전부 따로 사는 쪽 부모에게 쏟아내 버리게 되는 모습을 종종 보입니다.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비난할 꺼리가 없으면 때로는 이유를 만들어서 라도 비난하는 아이들을 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아빠는 자꾸 허리를 펴라고 해서 싫어요.’ 같은 식이죠. 그 아빠는 면접교섭 때마다 보는 아들이 왠지 구부정하고 위축되어 보이는 것이 싫어서 ‘허리 펴라’ ‘가슴 펴라’라고 잔소리를 하게 되었는데, 아이는 그 말이 너무 싫다는 핑계로 아빠를 만나기 싫다고 했던 사례가 있었습니다.

이른바 부모따돌림증후군(Parental Alienation Syndrome) 혹은 부모소외증후군이라고도 하는, 이혼부모의 아이들에게 나타나는 한 쪽 부모에 대한 증오, 적대, 기타 부정적 감정이 아이의 마음에 자리 잡아 아이의 건강한 성장과 발달을 저해하고 어쩌면 평생에 걸쳐 인격에 그 상처를 새겨 버릴만한 치명적 독소로 작용하는 일종의 장애 상태. 이러한 문제가 나타나기 쉬운 연령대가 저의 경험으로는 초등학교 중, 고학년에서 사춘기 초기 정도까지로 보이는데, 특히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이 그 시기 발달 특성 때문에 부모따돌림증후군에 좀 더 취약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접한 사례들에서 느낀 바로는, 이혼하고 따로 사는 부모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아이에게 생겨서 아이가 그 부모를 만나기 거부할 때, 많은 부모들이 당황하고 어쩔 줄 모르면서 ‘때가 오면 괜찮아지겠지’하거나 심지어 그것을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단지 그냥 놔두고 기다려 보자는 식으로 면접교섭을 중단해 버리고 마는 태도를 취하는데, 그것이 가장 나쁜 대응인 것 같습니다.

즉 태일씨처럼 아이에게 화를 내며, ‘네가 싫다면 나도 싫다’는 식의 유아적이고 미성숙한 태도를 보여서 부모로서의 의무를 방기하고 아이의 상태를 악화시키는 것이 나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아빠를 만나고 싶을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는 식으로 마냥 기다리다가는 아차 늦었구나 싶을 때엔 정말 늦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저 기다리기만 해서는 결코 다시 편안하게 아이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한 쪽 부모와 단절된, 아이의 복리(福利)에 반하는 상태를 방치하는 것이 아이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외양으로 합리화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빠를 안 만날 거예요’가 아이의 진정한 의사인 것도 아니고요.

앞서 부모따돌림증후군을 독(毒, poison)에 비유했는데요. 사람이 독에 중독되면 언젠가 독이 빠지겠지 하며 기다리지는 않지요. 얼른 독을 빼내야 건강하게 살아날 수 있는 것처럼, 이혼부모의 아이에게 생길 수 있는 한 쪽 부모에 대한 증오심, 적대감, 기타 부정적 감정은 그것이 아이의 마음속에 있는 것 자체가 그 아이에게는 현재, 그리고 미래에 계속 해롭게 작용하는 독소인 만큼 곧바로 조치를 하고 해독을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아이와의 면접교섭을 꾸준히 해 나가는 것만큼 중요하고 결정적인 해결책은 없습니다. 면접교섭을 중단해 버리는 것은 중독을 더 악화시키는 것이고요. 면접교섭이 가능하고 원만해 질 수 있도록 아이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한 번 한 번의 면접교섭 시간을 잘 정하고 잘 지키고 충실히 잘 보내야 합니다. 아이가 비양육친과 함께 있는 시간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느낄 수 있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 노력은 비양육친만 해서는 안 되고 양육친과 비양육친이 함께 해야 효과가 있겠죠. 그리고 단지 노력을 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고 아이에게 부모가 함께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성심껏 보여주는 것, 즉 이렇게 너를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있다고, 너는 우리의 모든 노력을 다한 사랑을 받을 만한 가장 소중한 아이라는 것을 아이가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독이 서서히 빠지고 부모의 사랑의 기운이 다시 아이를 채울 때 비로소 아이가 건강히 잘 자랄 수 있는 마음의 기초체력이 생기는 것일 테니까요.

임수희 부장판사는…

현재 수원지방·가정법원 안산지원에 재직 중이며 아동의 최상의 이익을 위해 면접교섭의 중요성 및 바람직한 방법을 안내하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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