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풍경] 마지막 소원

입력 2022-11-2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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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석 보령신제일병원장, 내과전문의

“소원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있을까요?”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께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 손을 꼭 잡았다. 폐암 말기로 진단받은 그분은 이미 죽음을 인지하고 계셨던지 마지막 소원이라며 애절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무슨 부탁이신데요? 가능하면 들어드릴게요.”

“실은 제가 어렸을 때 철부지 짓을 좀 했습니다. 당시 친구들과 어울려 등 쪽에 문신을 새겼는데 그걸 지우고 싶어서요.”

“왜 진즉에 지우질 않고 이제와서….”

“그동안은 삶이 너무 고달팠습니다. 문신을 떠올리지도 못할 정도로. 그런데 생각해보니 제가 죽고 나면 염을 할 텐데 문신이 맘에 걸려요. 제 딸애한테는 못났던 아빠의 과거를 보이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호흡곤란이 심한 상태에서 그것도 우리 병원에선 할 수 없는 피부시술을 받기 위해 외부로 나가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께선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우셨고 식사까지 거부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법 없이도 살아온 분이 그깟 문신이 무슨 대수라고. 어휴! 몸 상하기 전에 식사라도 좀 하세요.”

구슬리고 달래기를 며칠, 그동안 할머니의 끈질긴 설득으로 다행히 그분은 고집을 꺾으셨지만 그래도 회진 때면 늘 내게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곤 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할아버지께 욕창이 생겨 어쩔 수 없이 엎드리게 한 후 등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어떤 문신이나 젊은 날의 잘못에 대한 표식이 아니었다. 그저 반복적으로 긁히고 헤어진 상처 위로 생긴 노을처럼 붉고 두꺼워진 할아버지의 피부뿐. 그곳에는 오랜 세월 동안 등에 짐을 지고 나른 탓에 새겨진 아버지로서의 무게만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난 그분의 등 사진을 찍어 할아버지께 보여 드렸고 말없이 미소 짓던 환자분께선 며칠 후 편안히 눈을 감으셨다.

요즘 유독 포털사이트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다. 자기의 잘못이 명백히 드러났지만 감추고 왜곡하기 바쁜 그들. 죄책감조차 못 느낄 정도로 두꺼운 철판이 깔린 그들의 얼굴에 덧대어 내 눈앞엔 오래전 문신을 지워달라고 마지막 소원을 말씀하시던 한 할아버지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그리고 오늘 똑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난 과연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고민해본다. 잘못이 잘못을 덮어 철보다 두꺼운 딱지가 앉은 쪽일까, 아니면 평생 선하게 사셨지만 오래전 잘못조차 지우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던 할아버지 쪽일까.

가을은 제법 이른 저녁이 온다. 노을이 서서히 내려앉은 진료실 바닥엔 그 옛날 할아버지의 등에서 보았던 검붉은 세월의 흔적이 또렷이 새겨지고 있었다.

박관석 보령신제일병원장·내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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