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시각] 불행을 방법 삼아서는 불행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한다

입력 2022-08-25 05:00
  • 가장작게

  • 작게

  • 기본

  • 크게

  • 가장크게

시인, 인문학 저술가

올여름엔 하늘이 찢긴 듯 쏟아지는 폭우로 도처에서 물난리가 났다. 반지하 주택이 삽시간에 넘친 물에 잠겨 사람이 죽고, 빗물을 빨아들이는 맨홀 구멍으로 사람이 찰나에 사라지고, 다수의 수재민들이 생겨났다. 수해로 가족을 잃은 분들이나 삶의 터전을 상실한 이들에게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을 테다. 수해 현장은 참혹했고, 그 참혹함을 몸으로 겪은 이들은 이 고통이 남과 나눌 수 없을 때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아무튼 여름은 끝나간다. 매미울음 소리는 쇠약해지고, 밤에 우는 풀벌레소리의 데시벨은 한껏 높아진다. 매미는 성체가 되어 고작 2주일 남짓 살고, 저 풀벌레들 수명도 석 달을 넘지 않을 테다. 무릇 곤충이나 사람에게 닥치는 죽음을 막을 방법은 없다. 죽음이란 생체 안에서 대대적인 무질서가 번지는 상황이다. 덧없지만 모든 생은 조만간 저 무질서에로 끌려들어 갈 것이다.

우리는 여름의 땡볕을 듬뿍 빨아들여 까맣게 익은 캠벨포도 한 송이를 먹거나 두텁게 썬 민어회 몇 점을 입에 넣고 그 식감과 풍미를 음미하며 여름의 소동을 통과한다. 최저주의 낙원에 머무르는 자들은 죽은 듯 미동도 하지 않는 도롱뇽처럼 웅크리고 재난을 견뎌냈을 테다. 과연 재난이 할퀴고 간 이 고열다습한 여름을 견디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생에의 본능, 우리 안의 갈망들, 어둠을 견디면 머리 위로 별이 뜨리라는 가느다란 희망들, 여름은 어차피 끝나고 가을이 오리라는 설렘 같은 것이 아닐까? 인간이 불사조거나 무적의 존재는 아니지만 가난, 병고, 재난이나 권태 따위는 너끈히 이겨낼 만한 내구력을 갖고 있음은 분명하다. 우리는 너그러운 후견인 하나 없는 생을 버티며 계절의 순환을 살아내는 것이다.

지난여름 나는 눅눅한 습기에 젖은 채로 프랑시스 퐁주의 시집 ‘사물의 편’을 읽었다. 식물은 잎으로 광합성을 하고, 뿌리로 무기염류를 채집한다. 식물은 그렇게 제 원형질을 생산하며 저만의 식생으로 군집을 이룬다. 식물은 사람이 갖지 못한 여러 덕목들을 품고 있지만 식물의 자세는 생존의 형태를 굳힌다는 점에서 절망감을 안긴다. 식물은 닫힌 상자에 있는 것처럼 저마다 고립되어 개체로 불행을 감당한다. 식물은 한 자리에 뿌리를 박고 붙박이로 살아가는 동안 자신에게서 멀리 달아날 수 없다. 식물은 제 안을 동물의 부재로 채우며 자기로부터 달아날 수 없음이라는 절망을 체화한다. 우리는 식물들의 내밀한 삶에 대해 자세하게 알지 못한다. 나무는 그 내밀한 삶을 열어 보인 적이 없다. 시인의 통찰에 따르면 식물의 본질적 자질은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음, 즉 ‘부동’에 있다고 말한다. “양분이 되는 원천이 주면에 넘쳐나고, 온갖 거주지와 끼니 걱정으로부터 해방된 존재에게만 허락된 것이 있으니, ‘부동’이다.”(프랑시스 퐁주, ‘사물의 편’ 137쪽) ‘부동’은 식물에게 구속이 아니라 해방의 다른 이름이다. 나는 무엇에 홀린 듯 ‘사물의 편’에 나오는 한 구절 “나무를 방법 삼아서는 나무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를 되새김질한다. 그 문장은 다양하게 변주하는 놀이를 하며 무더위와 그것이 불러오는 지루함과 싸웠다. “부처를 방법 삼아서는 부처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라거나 등등.

그러니까 “불행을 방법 삼아서는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문장의 기원은 프랑시스 퐁주다. 불행을 방법 삼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기 십상이다. 불행은 존재의 가능성을 무너뜨리고 뭉갠다. 이상하게도 불행의 그림자만을 밟는 사람은 늘 태어남을 문제 삼는다. 불행의 원인이 태어남에 있다는 믿음이 그들의 뇌 속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는 모양이다. 태어남에 대한 반감을 가진 사람을 비관론자라고 한다면 철학자 에밀 시오랑이 떠오른다. 그는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을 꿈꾼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행복이며, 자유이며, 공간인가!”라고, 말한다. 사람의 태어남이 필연의 운명이라면 태어나지 않음을 가정한 사유는 패러독스이고 형용모순이다. 노스탤지어를 부정할 때 인간의 불행은 속수무책으로 깊어지는데, 그 불행은 주체 내면에서 정화 작용을 하고, 인격을 고양시키는 슬픔을 배제한 건조한 불행이다. 슬픔은 죄와 과오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감정과는 다르다. 또한 불행은 우리를 살게 하는 동력인 갈망을 부정한다.

우리는 세월이 흐른 뒤 수해로 얼룩진 지난여름을 더듬으며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그리움에 사로잡힌다. 기억은 세월이 흐를수록 빈곤해지며 동시에 풍요로워진다. 노스탤지어는 기억의 윤색으로 풍요로워진 그때의 사람들, 슬픔과 기쁨의 찰나를 소환한다. 그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불가능의 시간이고, 돌아갈 수 없는 장소다. 노스탤지어는 단순히 과거의 부재에서 작동하는 정동이 아니다. 그것은 손에 거머쥐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애매모호한 슬픔이고 그리움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다. 마치 맹인이 눈동자가 아니라 눈꺼풀로 점자책을 읽듯이 우리는 손으로 부재의 기원을 더듬어가며 과거를 읽는다. 노스탤지어는 “대상 없는 슬픔, 갈망을 만들어내는 슬픔”이고 “욕망에 대한 욕망”이다.(수잔 스튜어트, ‘갈망에 대하여’ 59쪽) 수잔 스튜어트에 따르면 노스탤지어의 바탕은 슬픔이다. 노스탤지어가 가리키는 최종 목적지가 에덴동산 같은 유토피아라면 유토피아로 돌아가는 길이 막힌 자의 슬픔, 갈망은 있으나 그 갈망하는 대상의 자리가 비어 있음을 확인한 자의 슬픔이다. 유토피아는 우리 안에 편재하는 태초의 세계, 상상계가 지어낸 꿈, 영원한 부재의 초월성의 자리다.

미래의 과잉이 현재를 과거로 밀어낸다. 과거는 늘 현재의 일로써 문제를 끌고 들어온다. 이때 현재란 미래의 과잉으로 그 빛을 잃는다. 현재에 흩어진 것은 과거의 껍데기뿐이다. 현재가 과거에 연루되었다는 점에서 과거 소환은 그 정당성을 얻는다. 과거는 결핍으로 저 스스로를 재생산해낸다. 이를테면 과거사 진실규명 위원회가 문제 삼는 것은 늘 현재의 시점으로 소환된 과거의 잔해들이다. 2005년 12월 활동을 시작한 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5년간 8500여 사건의 진상을 캐내고 과거 판결을 바로 잡거나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에서 위자료를 받아낸다. 과거사정리법에 근거해 반민주·반인권 행위의 사례들과 폭력·학살·의문사 사건 등을 일일이 캐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은폐된 진실을 드러낸 것은, 실은 ‘과거 규명’을 바탕으로 ‘미래’의 진실과 그 방향성을 짚어낸 것이리라.

우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가면 뒤에 숨은 사람으로 살아간다. 관객으로 나선 타자들 앞에서 우리는 삶을 연기한다. 삶이라는 무한한 총체성을 연기로써 받아내는 것이다. 누군가는 착한 사람을, 누군가는 대인의 풍모를, 누군가는 타인을 환대하는 주인을, 누군가는 비극의 주인공을 연기한다. 연기하는 것은 우리 안의 자아다. 이 변덕스런 자아의 기분과 판단에 따라 우리는 각자의 배역에 최선을 다한다. 나는 늘 갈망하는 자를, 읽고 쓰는 자를, 노스탤지어에 빠진 자를 연기한다. 연기하며 산다는 것은 타자에게서 타자성을 훔치며 그 욕망을 흉내 낸다. 우리는 자기의 삶을 산다고 말하면서 타자의 욕망을 흉내 내는 것이다.

올여름 재난을 겪었거나 그럭저럭 잘 견뎌낸 이들은 곧 서늘한 가을의 기운 속에서 생에의 의지를 북돋으리라. 자, 이쯤에서 여름을 떠나보내자. 우리 안의 갈망을 소비주의 욕망이 아니라 존재 생성의 에너지로 바꾸고, 우리 안에서 타오르는 노스탤지어를 존재의 진정성을 획득하는 계기로 전환하면서! 안녕, 여름아! 우리의 전별을 받은 이 계절은 다시 오지 않겠지만 여름은 미래-과거로 돌아가서 또다시 우리에게로 회귀한다.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추가취재 원해요0

주요 뉴스

  • 법정상속분 ‘유류분’ 47년만에 손질 불가피…헌재, 입법 개선 명령
  • 2024 호텔 망고빙수 가격 총 정리 [그래픽 스토리]
  • "뉴진스 멤버들 전화해 20분간 울었다"…민희진 기자회견, 억울함 호소
  • "아일릿, 뉴진스 '이미지' 베꼈다?"…민희진 이례적 주장, 업계 판단 어떨까 [이슈크래커]
  • “안갯속 경기 전망에도 투자의 정도(正道)는 있다”…이투데이 ‘2024 프리미엄 투자 세미나’
  • "한 달 구독료=커피 한 잔 가격이라더니"…구독플레이션에 고객만 '봉' 되나 [이슈크래커]
  • 단독 교육부, 2026학년도 의대 증원은 ‘2000명’ 쐐기…대학에 공문
  • "8000원에 입장했더니 1500만 원 혜택"…프로야구 기념구 이모저모 [이슈크래커]
  • 오늘의 상승종목

  • 04.25 장종료

실시간 암호화폐 시세

  • 종목
  • 현재가(원)
  • 변동률
    • 비트코인
    • 91,393,000
    • -4.17%
    • 이더리움
    • 4,490,000
    • -4.49%
    • 비트코인 캐시
    • 681,000
    • -5.68%
    • 리플
    • 746
    • -4.36%
    • 솔라나
    • 207,200
    • -8.88%
    • 에이다
    • 672
    • -5.88%
    • 이오스
    • 1,212
    • -2.81%
    • 트론
    • 167
    • +1.83%
    • 스텔라루멘
    • 161
    • -5.85%
    • 비트코인에스브이
    • 94,600
    • -8.07%
    • 체인링크
    • 20,880
    • -5.31%
    • 샌드박스
    • 649
    • -9.61%
* 24시간 변동률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