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풍경] 어느 모녀 환자

입력 2022-05-0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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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석현 누가광명의원 원장

동네 의사들은 환자들의 병과 함께 나이가 든다. 한 동네에서 10년이 지나고, 15년이 지나고, 또 그렇게 세월이 지나노라면 동네 의사는 그 동네 사람들의 병과 그리고 합병증과 함께 늙어갈 것이다.

모녀는 늘 같이 다녔다. 고혈압 약을 타기 위해 오시는 어머니는 늘 과년한 딸을 대동하고 진료실에 들어왔다. 뒤틀려진 한쪽 손, 절름거리는 걸음, 어눌한 말투로 ‘우리 엄마 약 드셔야 하지요?’라며 마치 자신이 보호자인 것처럼 딸은 언제나 당당했다.

언젠가 딸의 얼굴에 쓸린 상처를 바라보자, “또 발작이 나서 넘어졌지요”라며 어머니는 담담히 말했다. 장애가 있는 딸을 집에 혼자 두고 밖에 나오기가 뭐해 늘 데리고 다니는 것이었다. 서른이 넘은 딸의 목엔 집 열쇠가 목걸이인 양 걸려 있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 자신이 무슨 병으로 이 약을 먹는지도, 그리고 그마저도 자꾸 잊어버리는 어머니는 오늘도 딸을 데리고 진료실에 들어왔다. 아니 요즘은 딸의 손에 이끌려 병원에 오시는 것 같다.

“우리 엄마 약 잘 드셔야 하지요? 그런데 어제 또 안 먹었어요. 자꾸 까먹어서 큰일이에요.”

치매가 진행 중인 어머니는 병원 가는 것도 자주 잊어버렸다. 딸의 성화가 아니면 아마 약도 안 타러 오실 것이 분명하다. 이젠 정말 딸이 어머니의 보호자가 된 셈이다. 어눌한 말투는 여전했지만, 그날따라 목소리는 드높았다.

언제부터인가 모녀는 나한테 오시지 않는다. 이사를 간 것일까? 어머니의 치매 증상이 심해져 요양병원에라도 가셨나? 아니면 딸의 발작이 심해졌을까?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도로 옆 늘어선 푸르른 나무들이 새롭다. 십 년도 넘게 이 길로 출퇴근을 했지만 5월의 푸르름은 늘 새롭다. 한겨울 메말랐던 가지에 어느새 가득한 푸른 잎사귀들이 새로운 까닭은 지난겨울이 그만큼 매섭게 춥고 삭막했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도 때론 막연하고 버겁고 고단해 언제 평안하고 행복한 적이 있었는지 잊을 때가 있다. 그럼에도 문득 문득 5월의 푸르름처럼 기쁨과 행복이 선물같이 찾아올 때가 있다. 좋은 계절에 모녀의 삶에도 잊었던 선물이 찾아가길 기도한다.조석현 누가광명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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