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시각] 남녘의 바다에서

입력 2021-02-2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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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인문학 저술가

2월의 끝은 겨울 끝자락과 맞물려 있다. 겨울나기를 하느라 지친 기분을 전환하려고 나선 목포 여행이었다. 해안가 숙소에서는 남녘의 바다가 한눈에 보였다. 가없이 펼쳐진 저 바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바다는 나를 들뜨게 한다. 폴 발레리가 ‘해변의 묘지’에 나오는 저 유명한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가 환기하듯이 바다는 늘 새로운 생에의 의지를 북돋우는 곳이다. “바람이 인다! … 살려고 애써야 한다!/세찬 마파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한 닫으며,/물결은 분말로 부서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날아가거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부숴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 버려라/돛배가 먹이를 쪼고 있던 이 조용한 지붕을!” 평론가 김현이 번역한 ‘해변의 묘지’를 표지가 닳도록 읽어서 어떤 부분은 외울 지경이다.

나는 내륙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사람이다. 그런 내가 바다를 처음 본 것은 17세 때였다. 미래에 내가 어떤 존재가 될지 몰라 불안하던 그때 나는 바다가 보고 싶었다. 모란을 보아도 모란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당근을 먹는 노새에게 노새만의 기쁨이 있다는 걸 모르고, 시간의 무상함과 영원의 향기로움도 모르던 그 소년 시절, 막연하게나마 불안 속에서 내가 너무 일찍 세상에 왔다는 것을, 그리고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가출해서 동해안의 작은 항구로 도망갔다. 먼 바다에 오징어잡이 배들이 밤새 밝히고 있는 집어등을 바라보거나 생선 비린내가 진동하는 새벽의 어판장을 돌아다녔다. 낮엔 바닷가 언덕에 올라 눈이 시도록 바다를 바라보다가 저녁 무렵 내려왔다. 저 바다, 내 팔뚝 안에서 은빛 물고기처럼 펄떡거리던 바다! 바다는 괴롭고 쓸쓸하던 소년을 품어주던 도피처이자 은신처였다.

재난 앞에서 무력한 자는 절망한다. 절망은 저를 압도하는 것에게 무릎을 꿇는 일이다. 흔히 인간 영역을 넘어서는 압도적 재난이나 실패 앞에서 그 결과를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에 투항한다. 그 투항이 곧 절망이다. 목가적 삶을 꿈꾸는 어린 독서가에 지나지 않았던 나는 너무 일찍 괴물 같은 세상의 폭력에 노출되었다. 고등학교 교련 시간에 집총을 거부하며 예비역 군인에게 개처럼 두드려 맞고 정규교육 과정에서 이탈했다. 17세 소년의 절망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쉽지가 않은 일이다. 나는 절망한 자, 패배자였다. 포기하고 좌절하며 무력감에 물든 자다. 염세주의는 절망과 패배의 유력한 증거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에서 후퇴한다. 그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자로 머문다. 진짜로 절망한 자는 신을 부정하고,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 자기 자신을 부정한 자는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다리를 폭파하고 갈 길을 잃어버린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 온전한 자기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 참다운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그것은 자기의 척도로 세상을 재고, 자기의 의지로 제 삶을 세우는 일이다. 그걸 위해서는 세상과 투쟁해야 한다. 그것은 힘든 길이다. 철학자 니체는 누구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에 대해 사유한 사람이다. “‘너 자신이 되어라!’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언제나 소수만이 깨닫는다. 더구나 이들 깨달은 소수 중에서도 더욱 한정된, 극히 일부만이 모든 진실을 깨달을 수 있다.”(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나는 니체의 철학을 반평생 끼고 산 사람이다. 공포와 세계의 부조리에 짓눌려 의기소침해 있던 청년기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우연히 헌 책방에서 구해서 읽고 난 뒤 나는 불에 덴 듯 놀랐다. 그때 나는 19세였다. 변변히 이룬 것도 없이, 막연히 작가를 꿈꾸는 문학도였다. 가진 것이라곤 새벽의 슬픔, 몇 권의 책, 습작 노트, 낡은 타자기 한 대, 지독한 가난, 바흐의 음악, 무지, 정신의 나약함… 뿐이었던 시절이었다. 주어진 시간은 무진장이었지만 나는 그 대부분을 무위도식하며 흘려보냈다. 누구의 지시를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그 시간은 자유가 아니라 형벌이었다. 나는 수형자처럼 고통스럽게 내게 주어진 자유의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아버지의 무능은 뼈에 사무쳤다. 지적 오만에 빠져 있던 사춘기 때 나는 아버지를 향한 증오와 반항심으로 충만한 채로 방황했다. 그 철없던 시절 내 삶의 동력은 증오와 반항심이었는데, 증오와 반항심에 기댄 생이란 2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몰랐다. 나는 긍정도 모르고, 스스로를 사랑할 줄도 모른 채 한동안 음악감상실과 시립도서관을 떠돌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발견한 것은 가끔 들르던 동네 헌책방에 쌓인 책 더미였다. 그 책을 가슴에 품고 돌아와 내 방에서 정신없이 읽었다. 청년 니체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우연히 읽고 영향을 받았던 것과 비슷한 일이 내게도 일어났다. 니체가 젊은 시절 바그너의 음악과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늘 우울한 청년시절을 떠올린다고 적었다. 나 역시 니체와 함께 늘 우울했던 내 청년시절을 떠올린다. 아무튼 제목에 이끌려 손에 넣고 큰 기대 없이 읽은 그 책이 내게 준 충격은 설명할 길이 없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모든 구절에 나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를테면 “존재는 죄악이다”(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구절을 읽던 새벽, 나는 엎드려 울었다. 왜 울었는지 딱히 설명할 길은 없다. 책을 읽는 내내 가슴에 벅차오르는 환희와 감전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 책을 다 이해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그때 내 의식에 각인된 니체의 영향이 그토록 오래 지속될 수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20대 후반 좋은 대우를 받던 출판사를 박차고 나와 출판사를 차린 것도 새롭게 ‘니체 전집’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출판사를 창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니체 전집’의 번역에 착수했다. ‘니체 전집’ 10권을 완간하는데 5년쯤 걸렸다. 일본어 중역본이 대다수였던 그 당시 30대 번역가들이 번역해서 펴낸 ‘니체 전집’에 젊은 독자들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내가 구하는 것은 자유였고, 진리였으며, 길이었다. 니체는 방황하는 내게 길을 제시했던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니체는 자신에게 길을 묻는 자들에게 길을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이 나의 길이다. 그대들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그들에게 길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갈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는 왜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을까? 니체에게는 니체의 길이 있고, 모두에게 모두의 길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니체는 하나의 철학이 아니라 철학의 모든 것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하나의 거대한 거울이었다. 그 거울 앞에서 왜소하고 비쩍 마른 내 전신상을 보았다. 소름이 끼치도록 비루한 내 몰골을 보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나는 니체라는 거울을 통해 너무나 많은 것이 결여된 인간을 보았다.

나는 2박 3일 동안 목포에 머물렀다. 남녘에는 봄기운이 물씬하다. 공기는 오븐에서 덥힌 것처럼 따뜻하고, 바람결은 부드러웠다. 나는 겨우내 잃었던 입맛을 되찾고, 샘솟는 기대와 설렘으로 심장이 힘차게 뛰는 것을 느낀다. ‘해변의 묘지’를 읽으려고 독학으로 프랑스어를 공부하던 나는 일찍이 시인이 되었다. 내 안의 영혼이 지닌 말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바닷가를 걸으며 폴 발레리가 말한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을 곱씹고, 니체가 가르쳐준 ‘나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했다. 겨울은 전송하고 오는 봄을 맞으려고 남녘 바다를 찾은 것은 잘한 일이다. 목포의 한 해안가에서 만난 벚나무 가지마다 꽃눈은 도톰하고, 남녘의 공기는 깊이 들이마실 때마다 싱그러운 미나리향이 섞여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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