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발언대] "도시가스 놔드려야겠어요"

입력 2020-10-2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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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준 한국동서발전 사장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모두 잠든 깊은 밤, 자신을 불태워 따스함을 나누고 하얗게 부스러지는 연탄. 안도현 시인이 읊었던 연탄은 거리에서 자취를 감췄지만 필자의 기억 속에는 1970~80년대 낯익은 풍경으로 아련하게 남아 있다. 한겨울에 난방하려면 연탄으로 불을 때야 했던 시절이었다. 불을 꺼뜨리지 않으려고 새벽에 부스스 일어나 연탄을 갈아야 했다. 아침이면 다 탄 연탄재가 반쯤 깨진 채 골목길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연탄가스에 일가족이 중독되는 사고도 빈번했다. 1990년대 들어서자 기름보일러, 가스보일러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놔드려야겠어요”라는 TV 광고가 나온 것도 그때쯤이었다.

기억 한 편에 묻혔던 그 시절을 떠올린 건 지난달 경기 파주 농촌 지역에서 열린 연료전지 발전소 준공식과 도시가스(LNG) 개통식에서다. 할머니 한 분이 이전 추석 때 멀리서 가족들이 다 모여서 한창 음식을 준비하는데 액화석유가스(LPG)를 다 써버려 난감했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가스통에 남은 용량을 알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자 어느 주민이 “어머니 댁에 도시가스 놔드려야겠다”며 농담을 던져 웃음을 자아냈다. 도시가스가 들어오기 전 이곳 주민들은 LPG와 기름을 연료로 쓰고 있었다. 파주시 도심의 도시가스 보급률은 2018년 기준 89.3%에 달하지만, 농촌 지역 도시가스 보급률은 57.4%에 불과하다. 인구가 적은 농촌 지역에는 배관설비에 투자금이 많이 들고 경제성이 떨어져 도시가스 공급이 쉽지 않다.

동서발전이 파주시 도시가스 소외지역에 친환경 연료전지 발전소를 건설하면서 도시가스 배관공사를 무상 지원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자 주민들이 발전소 건설을 환영하고 나섰고 생활환경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LPG를 사용해 취사하고 기름보일러를 돌려 난방을 해왔던 74세대는 배관망 비용 부담 없이 도시가스를 사용하게 됐다. 지역 가정 LPG와 비교해 연간 123만 원의 연료비가 절감될 것으로 예상된다. 폭발위험이 대폭 감소해 주거안전도 높아졌고, 도농 간 에너지복지 불균형을 해소하는 데도 일조했다.

신재생에너지 사업을 개발할 때 흔히 지역주민들의 수용성 확보를 가장 큰 걸림돌로 꼽는다. 신재생에너지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지역이 찬반으로 의견이 나뉘어 서로 반목하게 된다면 과연 누구를 위한 에너지인지 되묻게 될 수도 있다. 사업추진 전 과정에서 주민이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합리적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사업모델을 개발한다면 결과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이는 파주 연료전지 발전사업에서 실제로 이루어낸 모델이기도 하다. 주민들의 애로사항을 듣고 상생방안을 제시해 100% 동의를 이끌어낸 후 사업을 추진했다. 발전소 부지, 용량과 타입을 결정할 때도 주민 의견을 반영했다. 독일 철학자 게오르크 헤겔은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바깥쪽이 아닌 안쪽에 있다”고 했다. 사업에 앞서 사람을 먼저 생각했기에 주민들도 마음을 열어주었던 것이 아닐까.

연료전지는 지금은 정부의 제도적 혜택으로 사업이 추진되는 경우가 많지만, 도심형 분산전원으로서 안전, 환경 문제가 없는 발전방식이기 때문에 미래에는 더 활성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연료전지 발전소를 세우려면 전력계통이 연결돼 있어야 하고, 도시가스 배관 조건도 충족돼야 하며, 수익이 나는 구조여야 한다. 모든 농촌 지역에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현재 포항시, 파주시에서 후속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쓴 시 ‘가지 않은 길’처럼 우리는 노랗게 물든 숲속 두 갈래 길에 서 있다. 하나는 갈등의 길, 다른 하나는 농촌 마을의 발전을 이끌어낼 수 있는 상생의 길이다. 지역사회와 상생 사례가 많아져서 에너지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는 일이 사라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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