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착취당하다②] "교수한테 밉보이면 끝"…'無 원칙'에 속 앓는 대학원생

입력 2020-07-15 17:00 수정 2020-07-15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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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노동환경이 많이 좋아졌다지만 여전히 많은 청년이 고통받고 있다. 일하고 돈을 받지 못하고, 과로로 건강이 나빠지기 일쑤다. 자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의 부당한 지시에도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 청년이 착취당하는 현장, 그곳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황기선(가명·33) 씨. 해당 학과에서 연구 조교를 맡은 기선 씨는 3일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토론회에 참석하는 지도교수가 기선 씨에게 100쪽이 넘는 자료를 보내 요약해달라고 했기 때문. 자신의 과제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지도교수의 지시까지 병행하는 지선 씨는 할 수 없이 자는 시간을 쪼개고 있다. 연구 조교로 장학금을 받지만 업무 강도를 생각하면 푼돈에 가깝다.

대학교 교수의 업무를 대신 처리하느라 속앓이를 하는 대학원생이 기선 씨만은 아니다. 대다수 교수가 연구에 매진하며 책임감 있게 제 일을 처리하지만, 일부 교수들은 여전히 업무 일부를 조교에게 떠넘기고 있다. 조교의 업무나 임금 체계가 명확하게 규정된 것이 없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다. 학교, 학계 내 교수의 권력이나 지위를 고려하면 다소 부당한 지시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50만 원 줄게. 자료정리 해줘"…대학원생들 "재수 없이 걸렸다"

공공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 기업 등에서 정책을 설립하고 사업 계획을 짜기 위해 교수들에게 연구를 의뢰한다. 일부 교수들은 이 연구를 조교들에게 미룬다. 교수가 책임지고 해야 할 일이지만 교육적 차원이라거나 연구 경험을 쌓게 해준다는 구실로 조교들에게 돌린다. 조교들은 이 대가로 연구비의 일부를 받긴 하지만 해야 하는 일과 비교하면 금액이 적을 때가 많다. 자신의 공부와 과제를 하는데 시간이 빠듯해 돈을 안 받고 연구를 도와주지 않는 편이 낫다고.

이 과정에서 임금체계가 제대로 잡혀있지 않아 받는 대가가 제각각이다. 교수가 각 조교에게 역할을 정해주고 비용도 임의로 결정해 지급한다. 자료정리를 했으니 50만 원, 자료정리와 보고서 작성에 이바지했으니 150만 원을 주는 식이다. 기준과 체계가 없다.

서울의 한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고상수(가명·33) 씨는 이를 "재수 없이 걸렸다"라고 표현했다. 그는 "사실 학교, 학과, 교수마다 조교들이 처지가 다 달라서 함부로 말하기는 힘들어요. 하지만 일부 교수들이 자기 일을 조교에게 떠넘기는 사례가 있죠. 연구가 들어오면 그에 따른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교수가 하는 게 아니라 조교가 해요. 최종 책임자나 대표자에는 교수 이름이 올라가고요. 조원 명에 대학원생 이름이 올라가죠. 일은 조교들이 다 하는 데 공은 교수가 가져간다고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조교로 활동하면서 받는 장학금 역시 교수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다. 보통 연구 조교를 하게 되면 한 학기 등록금을 장학금으로 받게 되는데 교수의 의중에 따라 조교를 2~3명을 더 둘 수 있다. 이때, 모든 조교가 한 학기 등록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금액을 2, 3등분 해 나눠 갖는다. 조교의 역할과 기여도를 책정해 장학금을 차등 지급하는 일도 많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계약서 쓰는 학교도 있지만…"학계 좁아 불만 표출 못 해"

교수의 지시에 따라 잡무를 하는 대학원생도 적지 않다. 국내 석박사들의 연구인력 채용정보 사이트 하이브레인넷에는 올해 1월 "지도교수가 이사하는 날 대학원생을 불러 일을 시켰다"라는 글이 올라왔다. 해당 글 작성자는 지도교수가 사적인 일에 운전을 시킨다고 했다. 작년 10월에는 "대학원생을 사적 업무에 동원하고 연구보다는 자신에 대한 충성도로 학생을 평가한다"라는 글도 게재됐다. 이 글에는 "한방에 제대로 보낼 거 아니면 화살이 학생에게 돌아온다"라는 댓글이 달렸다.

업무 범위나 임금체계에 원칙이 없다 보니 대학원생이 교수들의 사적 업무에 투입되는 일도 허다하다. 이로 인한 잡음이 생기자 일부 대학교에서는 지도교수와 조교 간에 계약서를 작성하기도 한다. 무슨 업무를 할 것인지 서로 합의해 계약서를 써 학교에 제출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유명무실하다. 합의한 내용만 지시하겠다는 의지가 담기긴 했지만, 학교 측에서 이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아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 대학원생들의 주장이다. 교수들의 갑질이나 사적 지시에 대한 고충을 처리하는 체계 역시 갖춰지지 않는 학교가 많고, 설령 체계가 있다 하더라도 대학원생은 자신에게 피해가 돌아올까 신고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서울의 한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이상호(가명·29) 씨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며 좌절감을 내비쳤다. 학교에서는 조교에게 학부생 시험 채점도 시키지 말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조교들이 학생 평가 업무에 참여한다고도 토로했다.

"사실 대학원생 중에 돈이 많은 사람은 드물어요. 돈도 빽도 없는 사람이 태반이란 뜻이죠. 그런데 교수가 조금 부당한 일을 지시했다고 어디에 신고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제가 매장당하는 거예요. 학계가 좁고 교수가 저보다 더 잘 알려진 사람인데 그를 저격했다가 뜻대로 안 되면 제 취업 길이 막히는 겁니다. 졸업할 때쯤 되면 연구실이나 회사로 학생들을 추천해주는데 이것도 어려워지고요. 자기 지도교수를 신고했다고 낙인이 찍힐 수도 있죠. 짧은 시간 그냥 버틸 수밖에요."

◇해외 대학원도 비슷하지만…

교수들에게 밉보이면 안 된다는 인식은 해외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교수가 가진 권한이 국내와 차이가 있다. 영국에서 석사를 마치고 국내 대기업에 취업한 강나루(가명·30) 씨는 해외와 국내 대학원의 차이를 명료하게 설명했다.

"영국이나 미국에서도 지도교수의 영향력이 커요. 한국과 다르지 않아요. 어떤 교수가 걸리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지는 것도 닮았죠. 제가 아는 지인은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는데 한국에 왔다가 미국에 갈 때 꼭 선물을 사가더라고요. 지도교수가 좋아한다고. 그런데 결정적인 차이가 있어요. 한국은 교수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지만, 미국이나 영국은 그렇지 않아요. 체계가 잘 잡혀있어요. 교수들 뒤치다꺼리를 하지 못하게끔 학교가 체계를 만들어가고 있죠."

국내 대학원생들의 바람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바로 명확한 체계와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 대학원생들은 "조교의 역할은 물론 지급되는 대가에 대해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체계와 기준이 만들어져야 한다"며 "학교가 이 노력을 게을리해선 안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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