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시각] 한 해의 끄트머리에서

입력 2019-12-26 05:00
  • 가장작게

  • 작게

  • 기본

  • 크게

  • 가장크게

장석주 시인, 인문학 저술가

한 해의 끝자락에 서니 마음속으로 여러 감회가 스쳐간다. 올해 내게는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다. 관습의 급류에서 비켜서서 호젓한 시간으로 침잠할 수 있는 날들의 고요를 좋아했다. 봄날 숲에서 흰나비를 보았고, 저 하천 어딘가에서 숨어서 울어대는 맹꽁이 울음소리를 들었다. 여름에는 혹서와 우기를 견디며 햇감자를 쪄먹고, 녹색 수박 몇 통을 깨서 달고 시원한 수박 조각을 삼키며 더위를 달랬다. 동네 텃밭에 자라는 옥수수와 해바라기를 바라보는 것도 나날의 소박한 즐거움이었다. 식물은 누구의 조력도 받지 못하지만 쑥쑥 잘 자랐다. 매미의 맹렬한 울음이 잦아질 무렵 태평양 중심에서 발원한 태풍이 북상하면서 한반도를 할퀴고 지나갔다. 그 와중에도 거센 비바람을 이긴 사과들은 붉게 익었다. 어느 날 태양은 시든 과일 같이 빛을 잃고 눈과 얼음의 계절이 왔다. 어느덧 동지가 지났다. 동지는 출산을 앞둔 만삭의 여인 같이 깊은 어둠 속에 새해 새날의 빛을 품은 채 기다린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과장, 거짓말, 피상성에 빠져 허우적거렸고, 그 사회의 일원으로 사는 일은 피곤했다. 정치는 진보와 보수로 갈라져 편협한 진영 논리에 빠져 대립과 갈등으로 날을 지샜다. 경제는 반등의 계기를 찾지 못한 채 바닥을 기었다. 지리멸렬한 나날의 삶을 등에 지고 모두들 힘겨워했다. 소상공인들과 자영업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은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는 일보다 더 힘들었다. 예전보다 줄기는 했지만 산부인과 병원에서 신생아들이 태어나고, 제 수명을 산 이들은 죽어서 화장장으로 실려 갔다. 크고 작은 교통사고가 끊이지 않고, 부당 해고당한 노동자들의 시위도 이어졌다. 산책로에는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이 있고, 주말의 대형 마트에는 인파가 붐볐다. 그 사이 자본과 결탁한 권력은 조금 더 타락하고, 거기에 빌붙는 자들의 행태는 뻔뻔하고 누추했다. 이웃들의 악덕과 평범한 악들이 도처에 창궐하고, 선량한 이웃들의 슬픔과 고통의 뉴스를 매체들은 다투어 실어 날랐다. 올해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유기견들이 생기고, 아무 죄없이 독살당한 길고양이도 부지기수다.

산다는 것은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겪어낸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루를 살면서 사랑과 이별을 겪고, 누군가와 계약을 하고, 우산 없이 외출했다가 만난 소나기에 옷을 적셨다. 누군가는 결혼식을 올리고, 누군가는 이혼을 하려고 가정법원으로 갔다. 날마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했지만 어느 하루도 완벽하게 똑같은 하루는 없다. 어느 날은 헬싱키로 떠나는 비행기를 타러 인천국제공항으로 나갔고, 어느 날은 세탁소에 맡긴 옷들을 찾아왔고, 어느 날은 누가 죽었다는 부음을 받았고, 어느 날은 집에서 부주의한 탓에 컵을 깨뜨렸다. 우리가 흘려보낸 하루의 안쪽에는 실존의 무늬들이 새겨지고, 하루는 존재의 물리적 토대가 되었다. 어쨌든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서 여기까지 숨 가쁘게 뛰어왔다. 한 해는 숱한 하루들이 모여서 만든다. 365개의 하루가 없다면 한 해도 없다.

하루는 시간, 공간, 장소를 하나로 아우르는 실존의 현장이고, 활동의 범주를 제약하는 시간이다. 하루를 벗어난다면 삶은 공허한 추상으로 흩어질 것이다. 그리고 하루는 내 사적 역사의 작은 한 조각을 이룬다. 그 조각들이 모여 큰 역사를 이룬다. 하루는 자꾸 흘러가 삶이라는 퇴적층을 만든다. 당신이 보낸 하루가 진짜 삶이다. 한 시인은 하루에 대해 이렇게 노래한다. “하루하루는 어디에 쓰는 걸까?/하루하루는 우리가 사는 곳이야./끊임없이 와서/우리를 깨우지./그 안에선 행복해야 하는 거야./하루하루가 없다면 우린 어디서 살겠니?”(필립 라킨, ‘하루하루’) 법과 이론, 주장과 규칙 아래에 전개되는 하루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삶의 시간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은 삶이라는 꽃을 받치는 꽃받침이다. 하루는 우리가 “사는 곳”이고, 새알을 품은 둥지 같이 우리의 삶을 품는다. 우리는 그 하루 안에서 비로소 행복하거나 불행할 수 있었다. 하루가 받쳐주지 않는다면 누구의 삶도 온전한 삶이 될 수가 없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숱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번잡한 세상과 한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은둔자처럼 산 것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소로는 1845년 7월 4일, 콩코드 고향 마을을 떠나 외딴 숲속 호숫가에 오두막을 지었다. 오두막은 존재의 거푸집이다. 소로는 오두막에 사는 동안 자발적 고독과 고립 속에서 온전한 하루를 누렸다. 그의 목표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삶에서 본질적인 사건에만 집중하고, 삶이 내게 가르쳐 주려고 하는 것을 배우고,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내가 제대로 살지 못했다고 깨우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겠다.” 소로는 그렇게 ‘전설적인 은둔자’가 되었지만 사실 그는 날마다 숲속에서 나와 마을을 찾아왔다고 고백한다. 마을에서 사람들과 만나 담소를 나누고, 어머니가 구운 파이를 먹고, 식구들과 저녁을 먹었다. 소로는 외딴 오두막에서 혼자 지내는 동안 ‘타인의 거울 안에서’ 사는 것의 피로감과 정신적 긴장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존재 안에서 오롯할 수가 있었다.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온전한 고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소로보다 더 극단적으로 세상을 등지고 고독을 누린 이가 덴마크 과학자이자 탐험가인 에이일 크누트다. 그는 북극의 빙산과 거센 바람, 그리고 혹독한 추위 속에서 썰매를 끌고 탐험을 이어갔다. 그는 진정한 고독 속에서 자기를 들여다볼 기회를 얻었다. “사회와의 연결고리를 끊고 고독을 선택한 자가 되어 인생의 냉담함, 놀라운 섭리, 아름다움, 기쁨을 더 예민하게 느껴” 보기 위해 오직 텐트 하나에 의지해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날마다 꽁꽁 얼어붙은 동토(凍土)를 가로질러 나갔다. 그의 하루는 어땠을까? “아침저녁으로 바뀌는 것은 딱 하나, 텐트의 둥근 개구부를 열면 보이는 바깥의 풍경뿐이다. 어제와 다른 지평선이 내 앞에 펼쳐진다. 침낭에 앉아 새롭게 발견한 것들, 어제 정복한 지역을 곱씹는다. 버너의 열기에 몸을 녹이고 탐험 일지를 꺼내 최신 성과를 기록한다. 지도를 펼쳐 새로 발견한 빙산, 곶, 크레바스는 물론이고, 과감하게 살펴본 미지의 땅을 표시한다.” 크누트는 하루하루 고독의 온전함 속에서 자연의 장엄한 위력을 과시하는 빙하와 폭설과 한파를 견뎠다. 그랬기에 삶의 본질에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우리가 산 하루는 어디로 사라지는가? 하루하루는 연속적인 흐름 속에 있다. 꿈과 욕망의 시간인 하루는 기어코 사라진다. 사라짐은 무(無)이고, 종말이다. 사라지는 것들은 존재 너머로, 종말 너머로 사라진다. 어쩌면 사라지는 것은 우리가 산 하루하루가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인지도 모른다. 저무는 하루, 두 번 반복하지 않는 하루, 그리고 한 해가 긴 그림자를 끌고 사라진다. 이제 어둠 속에서 새로운 내일이 동터 올 것이다. 새날을 기다리며 나는 기도를 하듯이 나 자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연둣빛 새순 앞에서 벅찬 기쁨으로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얼음장 밑으로 흘러가는 물소리를 들으며 행복했던 적은 있습니까?

새벽 산 능선 위로 번져가는 여명의 빛에 마음이 더워지며 참혹할 정도로 강렬한 생에의 의지를 느꼈던 적은 있습니까?

젖내 나는 아기를 안고 충일감을 느꼈던 적은 있습니까?

눈 쌓인 참대 숲에서 일획을 그으며 날아가는 참새의 기척에 설화가 분분하게 날리는 광경을 보고 한참 동안 발을 멈추고 황홀했던 적은 있습니까?

부엉이가 우는 밤에 하는 일마다 미욱한 제 모습이 미워져 목놓아 울어 본 적은 있습니까?

초발심을 잃지 않은 사람만이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추가취재 원해요0

주요 뉴스

  • 단독 ‘작업대출’ 당한 장애인에 “돈 갚으라”는 금융기관…법원이 막았다
  • "중국 다시 뜬다…"홍콩 증시 중화권 ETF 사들이는 중학개미
  • 극장 웃지만 스크린 독과점 어쩌나…'범죄도시4' 흥행의 명암
  • 단독 전남대, 의대생 ‘집단유급’ 막으려 학칙 개정 착수
  • '눈물의 여왕' 결말은 따로 있었다?…'2034 홍해인' 스포글
  • 오영주, 중소기업 도약 전략 발표…“혁신 성장‧글로벌 도약 추진”
  • 소주·맥주 7000원 시대…3900원 '파격' 가격으로 서민 공략 나선 식당들 [이슈크래커]
  • 근로자의 날·어린이날도 연차 쓰고 쉬라는 회사 [데이터클립]
  • 오늘의 상승종목

  • 04.29 장종료

실시간 암호화폐 시세

  • 종목
  • 현재가(원)
  • 변동률
    • 비트코인
    • 89,678,000
    • -1.65%
    • 이더리움
    • 4,529,000
    • -4.55%
    • 비트코인 캐시
    • 655,500
    • -4.72%
    • 리플
    • 736
    • -0.94%
    • 솔라나
    • 191,800
    • -5.93%
    • 에이다
    • 644
    • -4.02%
    • 이오스
    • 1,136
    • -2.41%
    • 트론
    • 170
    • -1.16%
    • 스텔라루멘
    • 159
    • -2.45%
    • 비트코인에스브이
    • 91,950
    • -4.81%
    • 체인링크
    • 19,960
    • -1.24%
    • 샌드박스
    • 622
    • -5.33%
* 24시간 변동률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