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발자국엔 소리가 없다

입력 2019-04-1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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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교열팀장

저비용·작은 공간으로도 사람들이 ‘함께’ 행복하게 생활하는 것. 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도시 재건을 맡은 르 코르뷔지에(1887~1965)의 최대 관심사였다. 고심 끝에 그는 마르세유에 고층 공동주택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세운다. 340여 가구에 무려 1600명이 살 수 있는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세계 건축사에 ‘아파트의 효시’로 이름을 올린 바로 그 건물이다. 단순히 가족끼리 먹고 자고 쉬는 공간이 아니라 ‘공동체’까지 포함한 건축 개념이다. ‘르 코르뷔지에=현대건축의 아버지’가 성립되는 순간이다.

최근 새 아파트에 입주한 지인을 만났다. 2년 전 봄 ‘르 코르뷔지에展’을 같이 관람하며 ‘인간 중심’ 아파트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눴던 이다. 그날의 추억을 되살리자, 그녀가 어두운 표정으로 툭 한마디를 던졌다. “르 코르뷔지에가 저세상에서 우리나라 아파트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요?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층간소음 문제로 위아래층 이웃끼리 다투고…. 괜한 아이디어를 냈다고 땅을 치며 울진 않을까요.”

단독주택에 살 땐 ‘골목 주차’ 문제로 힘들었는데, 아파트로 이사하니 ‘층간소음’ 때문에 매일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털어놨다. 새벽녘 청소기 돌리는 소리, 의자 끄는 소리, 화장실 물 내려가는 소리는 기본, 가끔 거실등이 흔들린다고도 했다. “건축의 목적은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 르 코르뷔지에의 아파트 유토피아의 꿈은 우리나라에선 끼어들 여지가 없는 듯하다. 윗집 아랫집 가릴 것 없이 집에서 뛰어놀기는커녕 까치발로 걸어다녀야 하는 요즘 아이들이 가엾기 짝이 없다.

들머리(포털) 사이트에서 ‘층간소음’을 검색하면 다양한 소음들이 나온다. 발자국 소리, 문 여닫는 소리, 의자 끄는 소리, 구두 신고 걷는(?) 소리, 개 짖는 소리…. 그런데 이 중 ‘발자국 소리’는 잘못된 표현이다. 발자국은 발로 밟은 자리에 남은 모양이다. 그러니 발자국은 눈에 보일 뿐 소리가 없다. 만약 발자국에서 소리가 난다면 그야말로 정말 큰일이다.

“남은 발자국끼리/서로 뜨겁게 한 몸을 이루다가/녹아버리는 것을 보면//눈길에 난 발자국만 보아도/서로 사랑하는 사람의 발자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정호승 ‘발자국’ 중)”,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오르텅스 블루 ‘사막’ 중)”를 읽으면 ‘발자국은 보이는 것’임을 이해하기가 더 쉬울 듯하다. 소름 돋는 감동은 덤이다.

발이 바닥에 닿을 때 나는 소리를 말하고 싶다면 “발걸음 소리가 크다” 혹은 “발소리가 크다”처럼 발걸음, 발소리를 활용하면 된다. 발걸음은 발을 옮겨서 걷는 동작을 뜻하므로 모양과 소리를 다 갖고 있다.

이웃끼리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술도 한잔씩 하며 정을 쌓으면, 소음만으로도 그 집의 상황을 상상할 수 있으니 아주 조금은 즐겁지 않을까. 시인 고영민도 ‘즐거운 소음’에서 이렇게 읊었다. “아래층에서 못을 박는지/건물 전체가 울린다//그 거대한 건물에 틈 하나를/만들기 위해/건물 모두가 제 자리를 내준다//그 틈, 못에 거울 하나가 내걸린다면/봐라, 조금씩, 아주 조금씩만 양보하면/사람 하나 들어가는 것은/일도 아니다/저 한밤중의 소음을/나는 웃으면서 참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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