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어느 피고인의 항변

입력 2017-10-24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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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새하 정책사회부 기자

“모텔에 가자고 했는데 대답을 안 해서 (상대방이) 동의했다고 생각했다. 옷을 벗겨도 싫다고 안 했다.”

20일 서울 서초동 법원종합청사 505호. 술에 취한 여성을 모텔로 데려가 성폭행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A(33) 씨는 항소심 첫 재판에서 항변했다. 사건을 심리 중인 서울고법 형사11부 재판장 이영진 부장판사가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고 한 뒤였다.

A 씨는 “여자가 ‘싫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는 진심으로 억울한 듯 보였다. 분명히 상대방 의사를 물었는데, 아무 말 없어 ‘합의’한 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피해자는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술에 취해 의사 표현을 할 수 없었다.

문제는 A 씨의 태도가 낯설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자는 좋아도 싫다고 하니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며 웃으며 이 말을 내뱉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무의식 속에 잘못된 행동을 합리화할 수 있는 성차별적인 인식이 들어 있었다.

A 씨는 범행 당시 오토바이를 타고 피해자가 탄 택시를 약 6㎞ 뒤따라갔다. 그는 “택시를 왜 따라갔냐”는 재판장 질문에 “솔직히 마음에 들었다. 꼬시려는 마음도 있었고….”라고 답했다.

당당히 말하는 A 씨를 보면서 조남주 소설 ‘82년생 김지영’ 속 한 장면을 생각했다. 주인공 김지영은 초등학교 2학년 때 한 남학생에게서 심한 괴롭힘을 당한다. 선생님은 짝꿍을 혼낸 뒤 김지영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영이를 좋아해서 그런 거야.” 괴롭고 불쾌할 수 있는 행위를 ‘좋아함’이라는 감정으로 포장하는 셈이다.

이날 이어진 강력범죄 3건의 재판에서도 피해자는 여성이었다. 30대 남성 B 씨는 지나가던 20대 여성 2명을 상대로 ‘묻지 마 범죄’를 저질렀고, 40대 남성 C 씨는 동거 중이던 여성을 때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백혜련 의원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강력범죄 피해자 가운데 여성이 87.2%다. ‘여성 상위 시대’라는 말이 떠돌고 있으나 여전히 범죄 피해자 대부분은 여성이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남자는 여자가 자기를 무시할까 봐 두려워하지만, 여자는 남자가 자기를 죽일까 봐 두려워한다”고 했다. 강력범죄 밑바닥에 뿌리 깊은 여성 차별이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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