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공간] 토끼가 부럽다

입력 2017-09-05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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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은 듯이

씻은 듯이,

이 얼마나 간절한 말인가

누이가 개울물에 무 밑동을 씻듯

봄날 천방둑에 옥양목을 빨아 널 듯

혹은 밤새 열에 들뜨던 아이가

날이 밝자

언제 그랬냐는 듯

부르튼 입술로 어머니를 부르듯

아, 씻은 듯이

얼마나 가고 싶은 곳인가

《발견》여름호에서

삶은 상처의 연속이다. 몸과 마음이 다 그렇다. 그러나 상처는 어떻게든 낫기 마련이다.

베이고 긁힌 상처 아래 뽀얀 새살이 올라오고 살다 보면 저지르는 과오와 실패의 고통도 망각이라는 시간이 덮어준다. 그렇지 않다면 삶이 너무 무거워 어떻게 생을 유지하겠는가. 그렇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도 낫지 않는 상처가 있고 낫긴 하지만 흉터를 남기는 상처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이 없었던 일로 되돌아가거나 흉이나 꿰맨 자국 없이 원상태로 회복되기를 간절히 원할 때가 있다. 변신에 대한 갈망 혹은 되물릴 수 없는 과거나 현실에 대한 회한 등이 그것이다.

우리의 고전 소설에 ‘별주부전’이 있다. 토끼는 거북이의 꾐에 빠져 용궁에 들어가지만 그곳이 사지(死地)임을 알았을 때는 이미 때는 늦었다. 그러나 토끼는 기발한 꾀를 내어 위기를 모면한다. 용왕의 병을 고칠 수 있다면 간을 가져왔을 텐데 그런 줄도 모르고 간을 육지에 빼놓고 왔다고 하여 간을 가지러 육지로 나온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고래(古來)로 속고 속이는 인간 삶의 형태나 당대의 사회를 풍자하는 우화(寓話)이지만 사람의 병이나 장기를 모티프로 삼았다고 할 수도 있다. 토끼가 육지에 빼놓고 온 간처럼 병들거나 약해진 장기를 꺼내 깨끗하게 씻어 집어넣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현대의학은 못쓰게 된 장기를 더러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데까지는 온 것 같은데 ‘씻은 듯이’ 하기에는 아직 많은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다.

의학이 발전하는 만큼 인간을 못살게 하는 병마도 무섭게 앞서간다. 암이 바로 그것이다. 어느 날 갑자가 선고받은 병마에 대하여 인간은 무력하다. ‘씻은 듯이’는 특히 그런 곤경에 처했을 때 인간이 치유를 염원하는 간절함의 표현이기도 하다. 몸에 붙은 병마나 마음에 남는 상처를 흐르는 물에 흙 묻은 무 밑동을 씻듯 말끔하게 씻어낼 수만 있다만 얼마나 좋겠는가.

불가(佛家)에는 “아무리 좋은 일도 없던 일만 못하다[好事不如無]”라는 말이 있다. 업(業)의 얽힘을 극도로 경계하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인간의 ‘씻은 듯이’로는 도저히 쫓아갈 수 없는 경지이기도 하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씻은 듯이’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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