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 칼럼] 사랑은 식는 것이 아니라 익는 것

입력 2017-07-20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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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KBS 주말 드라마 ‘아버지가 이상해’에는 결혼인턴제 및 졸혼(卒婚) 이야기가 양념으로 등장한다. 온 가족이 함께 보는 시간대의 드라마에서 기존의 결혼 관행에 물음표를 제기하고 있는 걸 보니, 결혼의 의미도, 결혼의 위상도 세월 따라 변화하지 않을 도리가 없구나 싶다. 1970년대 서구에선 이미 결혼 안식년제를 주장했던 가족학자도 있었으니, 한 사람과 백년해로(百年偕老)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작업은 아닌 탓일 게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다는 ‘낭만적인 결혼’은 결혼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300년도 채 안 된 새로운 사건이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처음 낭만적인 결혼이 시도되던 당시, 사랑과 같은 불안정하고 예측 불가한 감정에 기대어 결혼과 같은 중차대한 결정을 한다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라는 우려 섞인 반론이 강력히 제기된 바 있었다.

낭만적인 결혼이 대세가 되면서 불행한 부부관계를 해소할 수 있는 출구로서 이혼이 규범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제 서구에선 사랑하는 동안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를 유지하고, 사랑이 식으면 이혼하고, 다시 사랑하는 사람과 재혼하는 이름하여 ‘연속적 일부일처제(serial monogamy)’가 라이프스타일로 정착했다. 결혼의 역사에서 이토록 많은 배우자를 갖게 된 건 역사상 유례가 없으리란 농담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한데 최근 들어 과연 이혼과 재혼을 반복하는 것이 진정한 대안인지를 묻기 시작하는 새로운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 동거 커플이나 재혼 커플의 이혼율이 일반 커플의 이혼율보다 높다는 사실 또한 주목을 요한다. 너나없이 이혼하는 미국에서 오랜 세월을 한결같이 해로해온 부부를 대상으로 “왜 이혼하지 않았는지?” 이유를 물었다. 이들 부부로부터 공통적으로 나온 답은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지금은 사랑이 존경과 신뢰로 바뀌었다”는 것과, “함께 사는 동안 많은 위로를 받았고 서로의 존재가 힐링이 된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었다 한다.

낭만적인 결혼의 토대가 되는 사랑은 열정적인 사랑을 염두에 둘 때가 많다.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가슴 떨리는 상대’가 있어 평생 함께 살기로 약속하고 결혼했는데, 결혼하고 보니 사랑이 식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사랑은 수명 주기가 있어 아무리 길어도 3년을 넘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이제 시행착오 끝에 직면한 진실은,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열정적인 사랑은 우리네 일상과 공존하기 어렵다는 사실, 더불어 사랑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성숙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랑은 결혼을 통해 식는 것이 아니라 익는 것이어야 하거늘 함께 있어 편안한 것도 사랑이요, 익숙하고 친숙한 것도 사랑임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사랑이 젊은 세대만의 전유물이 아님 또한 새삼스러울 것 없다. 최근 유럽에서는 노인 세대를 중심으로 ‘LTBT 커플’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LTBT는 동거를 의미하는 ‘Living Together’의 앞 글자와 별거를 의미하는 ‘But Apart’의 앞 글자를 합한 것으로, ‘별거동침’쯤에 해당한다. 홀로된 노인들이 동거를 하되, 법적·제도적인 문제가 복잡해지니 굳이 결혼제도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는 현상을 의미한다. 게다가 노년기에 선택하는 파트너의 기준은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함께 있으면 편안한 상대’를 찾아 나선다는 것이다.

우리 부모님은 마흔여덟 해를 함께 사셨는데, 두 분은 참으로 의가 좋으셨다. 워낙 말수가 적었던 아버지는 술이 들어가야 속내를 표현하시곤 했는데, 적당히 술에 취하면 “당신 없인 못 살아”를 외치시다 엉망으로 술에 취하면 “당신하곤 안 살아”를 되뇌시곤 했다. 취중진담(醉中眞談)이라고 어느 편이 진짜 마음인지 여쭈어보면, 빙그레 웃음만 짓곤 하셔서 끝내 아버지의 진심은 수수께끼로 남았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한 부부만의 깊고도 풍성한 정(情)이 자식들에겐 최고의 선물이었음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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