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과 함께하는 시간] 넓게 사는 나무, 깊게 사는 나무

입력 2020-01-1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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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일 신구대학교식물원 원장·신구대학교 원예디자인과 교수

겨울을 맞아 사나운 날씨가 이어지는 탓에 온통 움츠려 있는 제 모습과는 달리 식물원의 나무들은 왠지 모르게 의연하게 보입니다. 소나무처럼 녹색 잎을 여전히 달고 있는 나무들뿐만 아니라 잎을 모두 떨어뜨리고 줄기와 가지를 모두 드러낸 나무들조차 의연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식물원을 둘러싼 숲으로 발길을 옮겨봅니다.

이곳의 나무들도 의연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식물원 안에서 돌봄을 받는 나무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입니다. 어떤 곳에는 많은 나무들이 뭉쳐 있기도 하고, 어떤 곳에는 나무들이 뚝뚝 떨어져 홀로 서 있기도 합니다. 또 어떤 나무는 금세 쓰러질 듯 기울어져 있기도 하고, 어떤 나무는 꼿꼿하게 서 있기도 합니다.

숲속에서 사람의 손길 없이 자유롭게 사는 나무들은 식물원에서 돌봄을 받는 나무들과 달리 왜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갈까 궁금해집니다. 그 이유는 서로 다른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가진 나무들이 미세하게 다른 주변 환경 특성에 맞춰가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의 고유한 특성 중 하나가 땅속 뿌리가 뻗는 모양입니다. 어떤 나무들은 뿌리가 얕고 넓게 뻗는 반면, 어떤 나무들은 깊고 좁게 뻗습니다. 전문용어로 앞의 경우를 ‘천근성’이라 부르고 뒤의 것을 ‘심근성’이라고 부릅니다. 한자로 된 용어 그대로의 의미와는 조금 다르겠지만 ‘넓게 사는 나무’ 또는 ‘깊게 사는 나무’라고 풀어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돌아가 그 특성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 넓게 사는 나무는 얕게 사는 것이기도 하고 깊게 사는 나무는 좁게 사는 것이기도 합니다.

보통 천근성 나무들은 모여 사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람에 쉽게 넘어지는 등 주변 환경에 잘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심근성 나무들은 혼자서도 꿋꿋하게 서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 관계에서도 이런 경향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과 알고 지내지만 아주 깊은 속내까지 털어놓을 친구는 정작 별로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깊이 사귀는 친구는 있되 주변에 사람이 적은 사람도 있습니다. 나무나 사람이나 넓게 사는 것과 깊게 사는 것 중에 어떤 편이 더 좋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지식이나 교양 측면에서는 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넓게 많이 알지만 깊이가 얕은 사람을 ‘천박’하다고 하는 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비약일 수도 있겠지만 ‘천박함’의 부정적 의미가 사람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새로 받은 달력을 한 장 두 장 넘겨 보면서 올 한 해가 어떻게 펼쳐질까 생각에 잠겨봅니다. 언제인가부터 매년 반복되는 일상을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 느끼면서, 나이가 드는 걸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새해를 준비하면서 지난해 작성했던 일정표를 참고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반복되는 일상이 많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달력이나 다이어리를 준비하는 것과 함께 그간 받았던 수많은 명함과 전화기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살펴보는 것도 한 해를 시작하는 또 다른 일상이 되었습니다. 명함을 주신 분이나 전화번호를 알려주신 분들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메모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명함 또는 전화번호의 주인공은 도저히 얼굴이나 저와의 관계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은 대체로 연락했던 기록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결국 저는 이분들과 얕은 만남을 가졌던 것이고 그분들의 명함과 전화번호는 결국 제 손에서 떠나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명함 한 장을 파쇄하고 전화번호 하나를 지울 때마다 혹시 제가 점점 더 ‘천박’한 인간관계 속에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올해는 존경하는 선생님들, 그리고 많은 꿈을 함께 나눴던 친구들과 조금이라도 더 자주 마주 앉을 것을 새 달력을 넘기면서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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