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찬국의 세계경제] 폴 볼커가 남기고 간 것

입력 2019-12-1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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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

‘거목’ 또는 ‘큰 어른’은 널리 존경받는 인물을 지칭한다. 1927년 태어나 지난주 타계한 미국의 폴 볼커 전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에게 이런 호칭이 적합해 보인다. 그는 2미터의 장신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퇴임 후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전임·후임자들에 비해 그에 대한 사회적 신망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일찍이 능력을 인정받아 1960년대 케네디 대통령 시절부터 재무부 관료로 근무했고, 1979년에 카터 대통령이 볼커를 연준 의장으로 임명하며 그의 공적 커리어는 정점에 오른다. 당시 십 년 가까이 지속된 만성적 인플레이션을 멈춘 그의 공적은 모든 거시경제학 교과서가 빠뜨리지 않는 큰 업적이었다. 심각한 불경기를 불사하며 가차없이 통화 공급을 줄여 물가는 계속 오른다는 만연해 있던 기대심리를 불식시킨 것이다. 극심한 불경기로 사정이 나빠진 중소기업들과 서민들의 항의가 매우 거셌다. 엘리트 특권의식과는 거리가 먼 그에게 이런 일이 고통스러웠으나 정책 선택이 불가피했음을 측근에 토로했다 한다.

당시 불경기는 카터 대통령의 재선을 무산시켰다고 할 수 있으니 대선 경쟁후보였던 로날드 레이건은 수혜자였다. 하지만 심지가 곧은 볼커가 레이건 행정부의 늘어나는 재정 적자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며 대통령의 눈 밖에 나게 된다. 이 시기 미국 은행들의 멕시코 등 중남미 국가들에 대한 방만한 대출이 잘못되며 1984년 멕시코에서 큰 외환위기가 발생한다. 금융사의 이런 행태를 못마땅해했던 볼커는 은행에 대한 규제완화를 둘러싸고 행정부와 다른 입장이었다. 그가 1987년 백악관에 의장 재임명을 원치 않는다고 하자 레이건은 바로 그린스펀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볼커는 젊은 시절부터 공직에 몸담으며 청빈하게 생활했다. 세계의 경제 대통령이라고 불리기까지 하는 미국 연준 의장은 공무원이어서 월급이 그리 높은 편이 아닌데, 그에게는 큰 문제가 아닌 듯 평소의 검소한 생활을 유지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편의점에서 파는 시가(엽권련)였는데 호사가들이 ‘말똥에 담뱃잎을 섞어 만들었다’고 놀리는 최저가 브랜드였다. 잘 맞지 않는 싼 기성복 양복을 오래 입어 반짝거린다는 주변의 비아냥에도 무덤덤했다는 등 일화가 많다.

연준 의장직에서 물러난 볼커를 세계은행 총재를 지낸 제임스 울펀슨이 월가에 세운 자신의 금융사에 영입했고, 그 후 단기간에 30년 동안의 공직생활 전체 수입보다 많은 돈을 버는 등 큰 보상도 있었다. 하지만 금융업의 본거지에 있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정부의 개입과 구제를 암묵적 보증수표로 여기며 과도하게 위험한 투자를 서슴지 않는 대형 금융사들의 행태에 대해 경고를 멈추지 않았다. 이런 시각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오바마 정부가 주도한 미국 금융규제 재편과정에 반영되어 소위 ‘볼커 룰’이 만들어진다.

퇴임 후 대표적 공적 활동은 유대인 말살 정책(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후손과 스위스 금융사들의 분쟁 중재를 위해 1996년 만들어진 위원회의 의장직을 맡은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주도한 집단학살의 피해자였던 것만 해도 악몽이었을 텐데, 생존자나 희생자 가족들이 당시 스위스 은행들을 안전한 피난처로 여겨 예치했던 돈을 은행들의 비협조로 찾지 못하게 되자 국제적 문제로 불거졌다. 볼커 위원회의 중재로 12억5000만 달러의 기금이 조성되고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진다.

미국 공영라디오방송(NPR)의 부고 기사에 따르면 중앙은행 경제학 분야의 대가였던 멜처 교수는 생전 볼커가 뛰어난 경제적 판단력과 정치적 공격에도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는 능력의 보유자였으며, 세대를 대표할 기라성의 반열에 든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영국 경제일간 파이낸셜타임스는 작년 가을에 출판된 볼커의 자서전 서평에서 도덕적 용기, 청렴, 지혜, 신중함과 나라에 대한 봉사 등 로마시대 강조되던 덕목을 갖춘 인물이라고 평했다.

볼커가 말년에 목격한 세상, 특히 미국의 모습은 그를 실망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작년 가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정부에 대한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민주주의가 작동하겠느냐며 비관적인 심경을 토로했다. 선동의 풍파가 극심해 어느 때보다도 버팀목이 필요한 시기에 거목은 속절없이 우리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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