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권의 글로벌 시각] 한미상호방위조약 다시 읽기

입력 2019-08-0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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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주핀란드 대사

1953년에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A4 용지로 두 장이 채 안 되는 비교적 짧은 문서다. 과장된 수사나 군더더기가 없이 간결하고 명료한 문장들로 되어 있다. 이런 간결함이 이 조약에 기초한 한미동맹이 긴 세월 동안 성공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해준 요인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한미동맹과 관련된 발언와 행동에 적지 않은 변화가 나타나고 있고 때로는 깊은 우려를 자아낸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6월 싱가포르 북미회담 이후 한미연합훈련을 미친 짓이라고 해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올해 6월 30일 판문점에서는 5월에 북한이 발사한 미사일에 대해 “짧은 것이다, 누구나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하노이에서 한방을 먹은 김정은 위원장을 달래려고 하는 말이려니 싶었다. 7월 25일 북한이 미사일을 다시 발사하자 그는 미국에 대한 위협이 아니기 때문에 전혀 염려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분쟁을 벌이고 있고, 오랫동안 그래왔다”라고도 했다. 귀가 의심스러운 순간이다. 이날 북한이 발사한 미사일은 대한민국 전역을 타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미사일에 부착된 날개와 추가 연료 공급으로 일반적인 탄도미사일의 궤적을 벗어나게 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사일 방어체계로는 요격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 미사일에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북한의 단거리 핵미사일에 무방비로 놓여있다. 이런 우리의 안보 상황에 대해 동맹인 미국의 대통령이 전혀 염려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내용 가운데 가장 심금을 울리는 부분은 ‘어떠한 잠재적 침략자도 한미 양국 가운데 한 나라가 태평양 지역에서 홀로 서 있다는 환상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라는 표현이다. 한미동맹의 탄생 배경과 정신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하기 어려울 것 같다. 트럼프 대통령의 언사는 북한을 포함한 잠재적 적국들에게 대한민국이 태평양 지역에 홀로 서 있다는 환상을 줄 우려가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단어와 문장들이 유연하고 넉넉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다양한 상황과 변화를 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조약의 핵심은 태평양 지역에서 한 나라에 대한 무력 공격은 다른 나라의 평화와 안보에도 위험한 것으로 인식하고, 공동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처 방법은 각자의 헌법적 절차에 따르게 되어 있다. 누군가는 협상 당시 복잡다기했던 상황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 배경이나 상황은 다 지나갔다. 중요한 것은 조약의 문장이다. 지금 보아도 민주적 절차를 장착시킨 성숙한 합의로 보인다. 주한미군 문제도 대한민국이, 상호합의로 결정된 바에 따라, 미국에 육해공군을 주둔시킬 권한을 주고 미국은 이를 받는다고 되어 있다. 이 역시 주권국가들 사이에 서로 뜻을 존중하는 정중한 언어의 선택으로 보인다. 조약 제2항에는 ‘한미가 개별적으로 ‘그리고’ 공동으로, 자력으로 ‘그리고’ 상호 협조하여 무력공격을 억제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들을 유지하고 발전시킨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개별적’, ‘자력’이라는 말이 앞에 쓰여 있다. 이처럼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북한의 비핵화가 실패할 경우 대한민국이 개별적으로 그리고 자력으로도 대책을 강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핵무기를 억제하는 방법은 핵무기밖에 없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내구성은 공동의 이념이나 가치 같은 수사가 일절 없다는 점에도 기인한다고 본다. 전문에 보면 조약의 취지를 ‘모든 정부와 평화롭게 살고자 하는 희망을 재확인하고, 태평양 지역에서 평화의 기초를 강화하기를 열망하며’라고 하고 있다. 오로지 평화가 목적이다. 전문의 마지막 문장은 ‘태평양 지역에 보다 포괄적이고 효과적인 지역 안보체제가 발전할 때까지’라고 하여 조약 스스로 효용의 한계를 개념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특정 이념이나 패권 추구가 아니라 태평양 지역의 포괄적 안보체제 수립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종착역인 셈이다. 7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보아도 팔팔하게 살아있는 문서다. 특히 요즘 같은 하 수상한 시기에 꼭 한번 읽어볼 만한 문서다. 조(북)중상호원조조약과 비교해 읽어보면 더욱 흥미롭다. 1961년에 체결된 이 조약은 첫 문장에서 ‘맑스-레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원칙에 입각하여’라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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