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의 손편지] 캠퍼스의 봄을 추억하며

입력 2019-03-07 05:00 수정 2019-03-12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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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미세먼지라는 치명적 불청객에도 불구하고 맑고 높은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걸 보니 캠퍼스의 봄이 활짝 열린 기분이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엔 가슴 한쪽에 ‘뺏지’( badge·올바른 외래어 표기는 ‘배지’이지만 말맛 때문에 ‘뺏지’라 쓴다)를 달고 다녔었다. 배꽃 모양 가장자리의 은도금한 부분이 검게 그을린 듯 보이면 연륜이 묻어나는 3, 4학년, 그 부분이 반짝반짝 빛나면 영락없는 신입생이었다.

당시 신입생들은 어리고 촌스러운 티를 물씬 풍겼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무려 6년을 귀 밑 1cm 단발머리에 교복만 입은 채 갇혀 살다,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 꼬불꼬불 파마 머리에 투피스 정장을 맞춰 입곤 했다. 1970년대 후반은 주름치마 정장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잔 주름치마, 넓은 주름치마, 가운데만 주름 잡힌 치마, 가장자리에만 주름 넣은 치마, 각양각색의 주름치마를 입은 학생들이 구불구불 이어지는 교정을 활보하곤 했다.

지금은 중국인 관광객을 겨냥한 화장품 로드숍이 즐비하지만 70년대 중후반의 이대 앞은 유명 양장점의 거리였다. 전(前)해 겨울이면 이듬해 봄에 유행할 옷이 걸린다는 풍문이 돌았던 덕분인가, 이대 앞엔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멋쟁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소설가 최인호 씨는 “이화가 거기 있기에 젊은이들이 모여든다”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었다. 이대 앞 양장점이 하나둘씩 사라지게 된 건 그 즈음 ‘반도’ 기성복이 등장하면서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기성복 시장은 빠른 속도로 수제 양장점을 대체해갔고, 멋쟁이들은 매끄러운 옷맵시를 자랑하는 기성복으로 갈아탔다.

정장 차림에는 물론 핸드백과 굽 높은 뾰족 구두가 필수였다. 오른쪽 어깨엔 핸드백을 메고 책 두어 권을 가슴에 받친 채 7~10cm 굽의 구두를 신고 꼿꼿이 걸어가는 이들 대부분은 여대생이었다. 이대 맥가이버 아저씨로 유명한 구두 수선집 사장님은 “요즘 이대생은 멋쟁이가 아니다”라고 하신다. “옛날처럼 치마 정장 입고 뾰족 구두 신고 또각또각 소리 내며 다녀야 진짜 대학생인데, 지금은 온통 선머슴 같은 옷차림에 편한 운동화 신고 다니니 멋쟁이를 찾아볼래야 볼 수가 없다”며 혀를 끌끌 차시곤 한다.

대학의 봄은 유달리 미팅 소식이 넘쳐났던 기억도 생생하다. 혹시나 하고 갔다가 역시나 하고 돌아오는 것이 미팅이라지만, 3월이면 동문 미팅에 그룹 미팅에 반(班)팅에 소개팅에 하루가 멀다 하고 미팅 자리가 펼쳐졌다. 와중에 “1학년은 풍요 속의 빈곤, 2학년은 빈익빈 부익부, 3학년은 빈곤의 악순환, 4학년은 체제 속의 안정”이란 미팅 유머가 모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서울대생이 너랑 결혼해주겠다는 말 믿으면 바보, 연대생이 너하고만 사귀고 있다는 말 믿으면 바보, 고대생이 너를 놓아주리라 기대하면 바보, 서강대생이 수업 빠지고 너 만나러 왔다는 말 믿으면 바보”라는 이름하여 ‘이대생 바보 시리즈(?)’도 삽시간에 인기를 얻으며 회자되곤 했다.

‘뺏지’가 사라진 자리, 요즘 대학생들은 학교 이름이나 교표가 큼지막하게 새겨진 점퍼(일명 과잠)나 긴 패딩코트를 입고 다닌다. 비정규직 세대, 청년실업 시대, 금수저 흙수저 논란, ‘노오력’의 배신, N포 세대까지 20대를 주인공으로 하는 담론의 무게가 적지 않기 때문일까, 대학 캠퍼스의 낭만은 이제 낡은 옛이야기가 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세대가 대학생일 때도 선배들은 후배들을 향해 낭만이 없다고 질타했고, 시야가 좁고 이기적이란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그렇다면 2000년생 새내기들 또한 그들 방식대로 그들 나름의 낭만을 오롯이 즐기고 있을지 모를 일 아닌가. 괜시리 20세기 잣대로 21세기 흐름을 평가하고 폄하하기보다는, 젊음은 그 자체로 낭만적이요 아름답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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