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의 세상풍경] 30cm 대나무 자

입력 2017-01-06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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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상 위 연필꽂이엔 30cm 대나무 자가 꽂혀 있다. 10여 년 전 서울 인사동에 갔다가 추억의 물건을 파는 가게에 들러 사온 것이다. 그 가게에서 철수와 영희가 나오는 1960년대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도 보고, 그 시절의 공책과 학용품도 보았다.

그중 오래도록 내 시선을 붙잡은 것이 대나무로 만든 30cm 눈금자였다. 요즘은 모두 플라스틱 자를 쓰거나 아주 드물게 알루미늄이나 철로 된 자를 쓰는데, 그 가게에는 30cm 대나무 자와 20cm 대나무 자가 있었다. 아마도 요즘 아이들은 대나무로 젓가락을 만든다는 건 알아도 대나무로 자를 만든다는 건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

그날 그걸 사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초등학교 1학년 시절의 일을 떠올렸다. 나의 고향은 대관령 아래로, 다른 곳엔 꽃이 피어도 3월 한 달 여전히 춥고 여전히 눈이 내리는 곳이었다. 다른 지방은 3월이 되어 난로를 치워도 여전히 교실에 난로를 피웠다. 공부시간엔 조용해도 쉬는 시간 선생님이 잠시만 자리를 비우면 이제 막 서로 얼굴을 익힌 이 동네 저 동네 아이들이 교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어느 날 쉬는 시간에 한 아이가 교실 바닥을 닦는 걸레를 천장으로 던지며 장난을 쳤다. 그러다 누군가 던져 올린 걸레가 장작 난로 연통을 세게 쳐서 연통 사이가 벌어지며 거기에서 불기와 연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놀랐지만 이제 일곱 살이나 여덟 살 된 아이들로서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일이었다.

골마루까지 연기가 가득 차자 교무실에 있던 선생님들이 놀란 얼굴로 뛰어와 얼른 난로의 불을 껐다. 1학년 선생님은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이었다. 물을 부어 불을 끈 난로가 정돈되자 선생님은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 종아리를 걷고 선생님이 앉는 의자 위에 올라서라고 했다.

“선생님이 회초리로 한 대씩 때릴 때마다 너희들은 불, 조, 심, 이렇게 말해.”

선생님은 선생님 연필꽂이에서 30cm 대나무 자를 꺼내 아이들 종아리를 세 대씩 때렸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아픈 것을 참느라 ‘불, 조, 심’ 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요즘 같으면 그런 체벌조차 할 수 없겠지만, 그때는 그런 일 정도는 이제 막 학교에 입학한 개구쟁이들에게 불조심을 각인시켜주기 위해서라도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겼다.

예방주사를 맞을 때처럼 모두 불안한 얼굴로 차례로 줄을 서서 매를 맞는데, 선생님의 대나무 자가 내 종아리를 때릴 때 그만 짝 하고 갈라지고 말았다. 어린 마음에 아픈 것은 둘째치고 내 종아리가 선생님의 자를 망가뜨렸구나 하고, 아파서 운 게 아니라 선생님의 물건을 망가뜨린 게 너무도 큰 잘못을 한 것 같아서 큰 소리로 엉엉 울었다. 그러자 선생님도 나의 유별나게 큰 울음소리에 당황하신 듯했다.

다음 날 학교에 가서 선생님 얼굴을 보는 것도 여간 죄송스럽지 않았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자꾸 나를 불러 종아리를 걷어 보라고 하고, 이제 아무 흔적도 없는 내 종아리를 매일 쓰다듬어보곤 하셨다.

어릴 때는 그 자가 왜 그렇게 길게만 보이던지. 정말 긴 회초리 같은 느낌이었다. 그 선생님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 대나무 자를 만질 때마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다시 입학한 아이처럼 그 시절 오랜 친구들과 선생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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