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경애(廉瓊愛, 1100~1146), 즉 봉성현군 염씨(峯城縣君 廉氏)는 고려 중기의 귀족부인이다. 봉성(파주) 염씨로 할아버지 염한(廉漢)은 병부상서를 지냈고, 아버지 염덕방(廉德方)은 태부소경(太府少卿)을 역임하였다. 어머니 심지의(沈志義)는 의령군대부인 심씨(宜寧郡大夫人 沈氏)로 부덕이 있는 여성이었다. 염경애는 4남 2녀 중 맏딸이었는데, 아름답고
심지의(沈志義, 1083~1162)는 고려 중기의 귀족 부인이다. 묘지명(墓誌銘)이 있어 그녀의 생애를 알 수 있는데, 우선 눈에 띄는 것이 ‘지의’라는 이름이다. 우리는 흔히 전근대 시대에는 여성이 천시되어 이름조차 없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생각이다. 여성의 이름이 애초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쓰일 일이 없어 기록으로 남아 있
자운선(紫雲仙, 생몰년 미상)은 고려 무신 집권기의 기녀(妓女)이다. 처음에 이의민(李義旼)의 아들 이지영(李至榮)의 첩이었다가 이지영이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죽임을 당한 뒤 다시 최충헌의 첩이 되었다.
기녀는 이미 삼국시대에 김유신(金庾信)과 관련한 천관녀(天官女)의 존재가 보여 일찍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기녀는 관기(官妓)와 사기(私
장경왕후(莊敬王后, 생몰년 미상)는 고려 의종(毅宗, 1127~1173)의 제1비이다. 아버지는 강릉공 왕온(王溫)으로, 문종과 인경현비(인주 이씨, 이자연의 딸)의 아들인 조선공 왕도(王燾)의 아들이다. 1143년 태자비로 간택되었으며, 1146년 의종의 즉위로 왕비가 되었다.
1149년 맏아들 왕기(王祈)를 낳으니, 혼인한 지 6년 만이었다. 그간 의종
고대 여성의 이름과 행적을 찾기는 어렵지만, 그중에서도 가야 여성의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가야에서 여성의 행적을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 가야 멸망 무렵 이뇌왕(異腦王)의 왕비가 된 여성이 주목된다. 이 왕비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다양한 사료에 등장하고 있으며, 가야와 신라의 외교 분쟁에 중심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후대 신라와 가야
아로는 신라의 건국 시조인 혁거세 거서간(赫居世 居西干)의 딸이다. 신라의 건국 신화에는 혁거세의 왕비가 알영(閼英)으로 나타나는데 혈연적으로 아로의 친어머니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제2대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과는 남매간이다. 한편 남해차차웅의 왕비는 아루부인(阿婁夫人)으로 나타난다. 아로는 이 아루부인과 같은 인물이면서도 남해차차웅과 남매 관계에 있다고
명원부인은 신라 제11대 왕인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의 딸이다. 어머니는 10대 내해(奈解)이사금의 딸 아이혜부인(阿爾兮夫人)이다. 남편은 각간(角干)을 지낸 석우로(昔于老)인데, 내해이사금의 아들이다. 그는 어머니 아이혜 부인과는 남매간이므로 촌수로 외삼촌이 된다. 신라에서 왕실 여성들은 대부분 근친혼을 하였는데, 왕녀인 명원부인 역시 왕실 전통에 따라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에는 왕실 사람들이 묻힌 것으로 알려진 능산리 고분군이 있다. 고분군 왼편에 한 개의 탑과 금당이 일직선으로 배치된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 가람 배치를 한 백제시대 절터가 있다. 절터 중앙부 목탑자리 아래에서 45cm 높이의 석조 사리감(舍利龕)이 발견되었다. 이 사리감이 눈길을 끈 것은 감실 입구 양쪽 면에 글자가 새겨져
호동왕자(好童王子)와의 사랑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는 낙랑공주(樂浪公主)는 이름이 아니다. 문헌기록에 행적을 남긴 고구려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낙랑국 출신의 공주라고 해서 이름처럼 불리고 있는 것이다. 공주의 아버지는 낙랑국의 왕 최리(崔理)이다. 낙랑국의 공주가 고구려 역사에 존재를 남기게 된 것은 고구려 왕자와 혼인을 했기 때문이
고정희(본명 고성애)는 1948년 전남 해남에서 8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1970년 광주의 ‘새전남’과 ‘주간 전남’에서 사회부 기자로 근무했고, 1975년 ‘현대시학’에 ‘연가’, ‘부활과 그 이후’로 문단에 데뷔했다. 1979년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을 졸업했다. 그 뒤 ‘목요시’ 동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여성문학인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
공옥진은 1931년 전라남도 승주군(순천시)에서 4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공창식은 판소리 명창으로 한국 최초의 국립극장 협률사의 단원이었으며, 아버지 공대일도 명창으로 유명했다.
공옥진은 열 살도 안 된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팔려가 최승희 무용단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1945년 귀국해 조선창극단에 입단했고 1948년 고창 명창대회에서 장원
도금봉(본명 정옥순)은 1930년 인천에서 무남독녀 외동딸로 태어났다. 1950년대에 ‘대도회’, ‘청춘부대’, ‘창공’ 등의 악극단에서 단원으로 활약했다. 일제강점기 탄생한 악극단은 1960년대 TV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까지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당시 도금봉은 지일화(池一華)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
영화 데뷔 작품은 1957년 ‘황진이’(조긍
이태영은 1914년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났다. 1931년 평양의 정의고등보통학교, 1936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를 졸업했다. 1949년 여성 최초로 서울대 법대를 나온 이태영은 1952년 고등고시에 합격해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되었다.
이태영이 변호사가 될 무렵, 새로운 가족법(민법의 친족·상속편)을 제정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광복
공덕귀는 1911년 경남 통영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공도빈은 대한제국의 군인이었고, 어머니 방말선(일명 공마리아)은 남편과 사별한 뒤 삯바느질로 어린 아이들을 키웠다.
통영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공덕귀는 호주 선교사의 도움으로 동래 일신여학교에 입학했다. 공부는 물론 피아노와 운동에도 소질이 있었다. YWCA(기독교여자청년회) 학생회의 회
임영신은 1899년 전북 금산(현재는 충남)에서 12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전주 기전여학교에 입학한 뒤 ‘공주회’라는 비밀결사대를 조직해 독립을 모의했다. 3·1운동 때 기전여학교 교사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했다. 만세 시위에 참여하다가 경찰에 체포돼 투옥되었고, 극심한 물고문과 폭력을 당했다. 재판에
16세기 중반 경상도 성주에 살았던 이문건(李文楗) 집안의 여종이다. 이문건의 ‘묵재일기(默齋日記)’에는 향복이 자주 등장하고 있어, 이를 통해 여종의 삶의 모습과 성적 편린을 살필 수 있다. 사실 향복이 인물 란에 오를 만한가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요즘에는 보통사람의 삶의 모습을 찾아내는 것도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방식으로 등장했으며, 자료가
16세기 중반에 경상도 성주목(星州牧)에 소속된 관기(官妓)이다. 그녀는 성주에 유배 중인 이문건이 아끼던 정인(情人)이었으나 부인의 심한 투기로 인해 결국 황참군(黃參軍)이란 인물과 머리는 올리게 된다. 일반적으로 기녀는 경기(京妓)와 관기(官妓)로 구분하는데, 경기는 장악원에 소속된 예기이며, 관기는 지방 군현에 속한 기녀이다.
비(婢) 중에서 뽑는
1624(인조 2)∼1688년(숙종 14). 조선 제16대 인조의 계비이다. 성은 조(趙)이고, 본관은 양주이다. 아버지는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이며, 어머니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은 전주 최씨(全州 崔氏) 대사간 최철견(崔鐵堅)의 딸이다. 슬하에 자녀는 없다.
15세가 되던 1638년(인조 16) 왕비로 책봉되어 가례를 올렸다. 인조의
1532(중종 27)∼1575년(선조 8). 조선 제13대 명종의 왕비이다. 성은 심(沈)씨이며 본관은 청송이다. 아버지는 청릉부원군 심강(沈鋼), 어머니는 전주 이씨 이대(李薱)의 딸이다. 슬하의 1남이 순회세자(順懷世子, 1551∼1563)이다.
1532년(중종 27) 5월 심강의 맏딸로 태어나 11세에 두 살 아래인 경원대군의 부인이 되었다. 154
궁인 무비(無比, 생몰년 미상)는 고려 의종의 후궁이다. 처음에 남경(현재의 서울시)의 관비였다가 왕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았다. ‘무비’란 비교의 대상이 없다는 뜻이니 엄청난 미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무려 3남 9녀를 낳았다. 의종에게는 장경왕후와 장선왕후가 있었다. 장경왕후는 종친 강릉공 왕온의 딸로서 1남 4녀를 낳았고, 장선왕후는 관리 최단의 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