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 왕씨(1141~1183)는 고려시대의 독신녀이다. 아버지는 정의공(定懿公) 왕재(王梓)로, 현종 임금의 넷째 왕자인 정간왕(靖簡王)의 5세손이다. 어머니 왕씨 역시 왕가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왜 혼인을 하지 않았을까? 또 혼인을 하지 않는 삶이 사회적으로 허용될 수 있었을까? 우선 후자의 의문부터 풀어보도록 하겠다.
조선시대에는 모든 여성이 혼인을
동래군부인 정씨(東萊郡夫人 鄭氏·1104~1170)는 고려 중기의 귀족부인이다. 본관은 동래(현 부산시 동래구)이며, 할아버지는 동래의 향리 자제로 개경에 단신 유학하여 입신(立身)한 정목(鄭穆)이다. 아버지는 예부상서 지추밀원사 한림학사승지 지제고(禮部尙書 知樞密院事 翰林學士承旨 知制誥)를 지낸 정항(鄭沆)이고, 어머니는 재상을 역임한 왕국모(王國髦)의
평량군부인 이씨(平凉郡夫人 李氏·1099~1157)는 고려 중기의 귀족부인으로, 묘지명을 통하여 그녀의 일생을 엿볼 수 있다.
부인은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한 삼한공신(三韓功臣) 태광(太匡) 궁열(弓烈)의 외손으로, 아버지는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낸 이선(李琁)이다. 그녀는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어려서부터 여자의 일을 잘하였다. 자라서는 불경을
원덕태후 유씨(元德太后 柳氏·?~1239)는 고려 제22대 왕인 강종(1152~1213)의 왕비이다. 아버지는 종친인 신안후(信安侯) 왕성(王珹)이며, 어머니는 인종과 공예태후의 딸인 창락궁주(昌樂宮主)이다. 강종의 아버지인 명종도 인종과 공예태후의 아들이므로, 원덕태후와 강종의 혼인은 사촌간의 근친혼(近親婚)이라 하겠다.
강종은 1170년 최충헌(崔
선정태후(宣靖太后·?~1222) 김씨는 고려 제20대 왕인 신종(1144~1204)의 왕비이다. 아버지는 문종의 손자인 강릉공(江陵公) 왕온(王溫)으로, 신종이 즉위하기 전 평량공(平凉公)으로 있을 때에 혼인하였다. 신종은 인종과 공예태후(恭睿太后)의 다섯째 아들로, 인종 사후 큰 형인 의종이 왕위에 올랐고, 무신란으로 의종이 폐위되자 셋째 형(명종)이 즉
치술부인(鵄述夫人)은 신라 제18대인 실성왕(實聖王·재위 402~417)의 딸이자, 박제상(朴堤上)의 아내이다. 제상은 삼국사기에는 시조 혁거세의 후손이며 파사 이사금의 5세손이라고 하여 박씨라고 하였다. 삼국유사에는 김씨로 전한다. 제상은 눌지왕 대의 삽량주(歃良州, 지금의 경남 양산)의 지방관이었다.
실성왕은 신라 17대 내물왕(奈勿王·재위 356∼4
소서노(召西奴, B.C. 66∼B.C. 6)는 백제의 건국 시조인 비류(沸流)와 온조(溫祚)의 어머니, 백제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시조모(始祖母)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건국신화로서 백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비류와 온조의 이야기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북부여에서 졸본부여로 쫓겨오면서 시작된다. 당시 왕은 주몽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보고 딸을
사씨(史氏)는 신라 최초의 여성 출가자이다.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래한 이는 고구려 사람인 아도(阿道 또는 我道)이다. 아도가 처음 신라에 와서 불법(佛法)을 전하려고 할 때에 신라 사람들은 매우 꺼리고 심지어 죽이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아도는 일선현(一善縣·지금의 경북 구미)에 있는 모례(毛禮)의 집에 도망쳐서 숨었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모
고도령(高道寧)은 고구려 사람으로, 아도(阿道 또는 我道)의 어머니이다. 아도는 신라에 처음으로 불법(佛法)을 전한 인물이다. 삼국유사 흥법편(興法篇)에 실려 있는 아도본비(我道本碑)에 따르면 아도가 신라에 불법을 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아도의 어머니인 고도령 덕분이었다고 한다. 중국 위(魏)나라 사람인 아굴마(我崛摩)가 정시(政始) 연간(240~248
최은희(崔恩喜·1904~1984)는 1904년 황해도 연백 배천(白川)의 개화 교육자 집안의 5남 5녀 중 5녀로 태어났다. 해주 의정여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가 구류 처분을 받았다. 24일 만에 풀려난 뒤 다시 황해도 연백에서 만세시위를 주동했다. 해주지방법원에서 6개월 징역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살림꾼, 정정화(鄭靖和·1900~1991)는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로 손색이 없다. 그의 일대기 ‘녹두꽃’은 여성 독립운동사 연구에 한 이정표(里程標)가 된다.
서울에서 출생한 그는 충남 예산의 대지주 집안 출신인 아버지가 공부를 반대하는 바람에 오빠의 어깨너머로 천자문, 소학 등을 어려서부터 다 익힌 총명한 소녀였다. 191
1892년 평양에서 태어난 유영준(劉英俊· 1892~?)은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의 베이징(北京)여학교 모정서원을 다니면서 안창호 등 민족운동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귀국하여서는 3·1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와 일본적십자병원에서 의학 공부를 하였다. 이때 민족사회와 여성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도쿄여자유학생친목회 회지
1919년 남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참여한 3·1항일 만세시위의 횃불을 높이 든 사람 중 대표적인 여성은 단연 김마리아(金瑪利亞·1892~1944)다. 황해도 장연에서 일찍이 기독교를 접하고 개화된 아버지 김윤방과 어머니 김몽은의 세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소래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반드시 대학 공부까지 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상경, 언니
일제 강점기 사회운동에서 주목받은 한 여성, 그 이름 봉운! 봉황처럼 구름처럼 자유롭게 떠다녔다는 뜻일까?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우봉운(禹鳳雲·1889~?)은 정신여학교를 나와 1909년경 대구 계성여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후 중국의 북간도로 가 1912년 가을부터 이동휘(李東輝)가 주도하던 명동촌(明東村)의 삼국전도회에 가입하고, 명동여학교 교사
조선 역사를 통틀어 경제적으로 성공한 여성을 꼽는다면 단연 김만덕(金萬德· 1739~1812)을 들 수 있다. 1739년(영조 15) 제주에서 태어난 만덕은 10여 세에 부모를 잃고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자 어느 기생의 수양딸로 들어갔다. 만덕이 나이가 조금 들자 관아에서 그 이름을 기생 명단에 올렸다. 기생은 천인이었다. 만덕은 스물이 넘자 본인이 양인
1786년(정조 10) 봄, 한 시골 마을에 혼례를 마친 신랑·신부가 마주했다. 신랑은 혼인 전에 신부가 글을 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신부의 식견이 궁금해 어떤 시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신부가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의 시 ‘군재독작(郡齋獨酌)’에 나오는 “평생 오색 실로 순임금의 의상 깁고 싶어라[平生五色線 願補舜衣裳]”라는 시구를 좋아
“왜 이처럼 번거롭고 이해하기 어렵게 설명했을까?” 서영수합(徐令壽閤·1753~1823)은 수학 원리와 계산 방법을 아이들도 쉽게 배울 수 있게 설명한 ‘주학계몽(籌學啓蒙)’을 보다가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직접 법칙을 만들어 문제를 풀어보았다.
예컨대, 사다리꼴 모양의 밭 면적을 구할 때 ‘주학계몽’은 사다리꼴을 두 삼각형으로 나누어 각 면적을 구
조선 중기에 동래 정씨 집안에서는 걸출한 인물 세 명이 동시에 나왔다. 정태화(鄭太和), 정치화(鄭致和), 정지화(鄭知和)가 그 주인공이다. 당시 조선은 정씨가 움직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모두 정승까지 올랐다. 이런 명문가에서 소실을 위해 묘표(墓表)를 세웠으니 그 주인공은 의로운 여성이라 불리는 한계(韓係, 1643〜1669)다.
한계는 정치화(16
김호연재(金浩然齋·1681~1722)는 여성의 자존감을 거침없이 드러낸 ‘자경편(自警篇)’이라는 글을 남긴 여성이다. 본관은 안동이며 강원도 고성 군수를 지낸 김성달과 어머니 이옥재(본관 연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4남 4녀 중 딸로서는 막내였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이 고조부다.
호연재 가족들은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시집을 엮을 만큼
복녕궁주(福寧宮主, 1096~1133)는 고려 숙종과 명의왕태후 유씨(明懿王太后 柳氏)의 막내딸이다. 위로 오빠인 예종과 대녕궁주(大寧宮主), 흥수궁주(興壽宮主), 안수궁주(安壽宮主) 세 언니가 있었는데, 늦둥이인지 형제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예종은 1079년생이니 그녀보다 16년 위이고, 첫째와 둘째 언니가 1103년, 셋째 언니가 1105년에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