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金遷)의 어머니는 고려 고종 말~충렬왕 때의 사람이다. 명주(溟州, 현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아버지는 고을 향리인 김자릉(金子陵)이다. 그녀는 호장(戶長) 김종연(金宗衍)과 결혼하여 김천과 김덕린(金德麟), 두 아들을 두었다.
당시는 몽골과의 전쟁기로 몽골인들은 수많은 고려 사람들을 죽이고, 포로로 잡아갔다. 그녀와 작은아들 역시 포로가 되어 원
진씨(晉氏·생몰년 미상)는 고려 무신 집권기 최고의 문인이었던 이규보(李奎報)의 처이다. 아버지는 대부경(大府卿·종3품)을 지낸 진승(晉昇)이다. 그녀는 1192년에 혼인을 했는데, 당시 이규보는 25세, 그녀는 아마도 20세 전후로 추정된다. 남편의 선대는 경기도 여주의 향리 출신으로, 시아버지가 과거에 급제해 호부낭중(5품)을 지냈다.
남편은 어려서
아엄(兒奄)은 삼국시대를 살았던 6세기 여성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한반도의 패권을 치열하게 다투던 시기였다. 삼국은 특히 한강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접전을 벌였는데, 남한강 유역인 오늘날의 충주지역은 처음에는 백제가 차지했으나 고구려로 넘어갔다가 다시 신라로 주인이 바뀌는 등 격전지였다.
이 충주지역에서 12.4㎝ 크기의 광배(光背)
희명(希明)은 통일신라시대 사람이다. 경덕왕(景德王) 때 경주 한기리(漢岐里)에 살았다. 혼인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남편의 이름도 남아 있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한미한 집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희명이 이름으로 되어 있지만 본명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희명(希明)은 밝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아이의 눈이 다시 밝혀지기를 간절히 바랐던 일화에서 나왔을 수도
단의장옹주(端儀長翁主)는 신라 제48대 경문왕의 누이이다. 아버지는 김계명(金啓明)이며, 할아버지는 신라 제43대 희강왕(僖康王)이다. 경문왕의 어머니는 제45대 신무왕(神武王)의 딸인 광화부인(光和夫人)인데, 어머니가 같은지는 확실하지 않다. 경문왕 외에도 남자 형제로 진성왕대 향가집 ‘삼대목(三代目)’ 편찬을 주도했던 각간(角干) 위홍(魏弘)이 있다.
천명부인(天明夫人)은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어머니이다. 아버지는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이다. 진평왕은 복승갈문왕의 딸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金氏)를 왕비로 두었으며, 후비(後妃)로 승만부인 손씨가 있다. 천명부인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어 알 수 없다. 천명부인은 제25대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와 혼인하여 뒷날 태
8월 14일 ‘세계 위안부의 날’은 김학순(金學順)이 1991년에 일본의 전쟁범죄로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세계 최초로 공개 증언한 것을 기리는 날이다. 그보다 앞서 1975년 10월에 ‘위안부’였음이 공개된 여성이 있었지만 사람들의 기억에는 남지 않았다.
배봉기(裵奉奇)는 1914년 9월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머슴 일을 했고 어린
박경원(朴敬元)은 한국과 일본에서 2000년 즈음까지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로 각인됐던 인물이다. 중국군 항공대 소속이었던 권기옥보다 2년 정도 늦게 비행기를 탔지만 말이다. 언론들은 박경원의 성취와 스토리를 자주 보도했고 대중은 문명의 첨단으로 여겨지는 비행기를 탔던 조선 여성에게 열광했다. 연예인과 같은 인기를 누리던 그녀는 비행기 추락사고로
권기옥(權基玉)은 1901년 3월 1일 평남 중화군에서 4녀 1남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또 딸이 태어난 것에 실망한 아버지는 ‘어서 가라’는 심정으로 이름을 ‘갈네’라고 지었다. 한 살 아래 남동생이 소학교에 입학할 때에도 아버지는 권기옥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외가의 영향으로 권기옥은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목사의 도움으로 장대현 교회에서 운영
송계월(宋桂月)은 1911년 12월 10일 함남 북청군 신창면에서 태어났다. 아이가 오래 살지 못하겠다는 주변의 말에 어머니가 천한 이름을 짓는다고 계월이가 됐다고 한다.
송계월은 어렸을 때부터 어부이자 신창지역 사회운동단체 소속이었던 아버지 송치옥(宋治玉)의 영향으로 사상 방면의 책과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했다. 신창 지역의 3·1운동을 이끌었던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 양주의 중인 신분 가정에서 태어난 박자혜(朴慈惠)는 조선의 마지막 궁녀였다. 1911년 1월 왕실 고용인들이 해직될 때 궁녀 신분을 벗어나 같은 해 4월 숙명여고보 기예과에 입학했다. 1914년 4월 조선총독부의원 간호부과에 입학하여 1916년 10월에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조선총독부의원의 간호부로 근무했다. 일본
1895년 ‘근대개혁’의 명목으로 단발령이 공포되었을 때, 단발이 외세가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근대’임을 감지한 조선 남성들은 “목은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는 전통의 논리로 맞섰다. 한편 스스로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은 개화파 남성들에게 단발은 서구식 부국강병을 통해 조선의 미래를 선도하고자 했던 개화파의 메시지였다.
여성의 단발은
순조의 비 순원왕후(純元王后·1789~1857)는 본관이 안동이다. 1789년(정조 13) 아버지 영안부원군 김조순(金祖淳)과 어머니 청송 심씨의 장녀로 태어나 1800년(정조 24) 왕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삼간택(三揀擇)을 하기 전에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왕비 책봉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1745~1805)는 경주 김씨 김한구(金漢耈·1723~1769)의 딸이다. 1759년(영조 35) 15세에 영조의 계비(繼妃)가 되었으며, 그 후 왕대비, 대왕대비를 거치며 모두 46년간 국모의 지위에 있었다.
정순왕후 김씨는 그의 친정인 경주 김씨 가문을 통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녀가 계비가 되었을 당시
화완옹주(和緩翁主·1738~1808)는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의 막내딸로, 영조의 9녀이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친여동생으로 정조의 친고모가 된다. 12세 때 동갑인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과 혼인하여 슬하에 1녀를 두었다. 그러나 딸이 태어난 지 5개월여 만에 죽고, 딸이 죽은 지 한 달도 못 되어 남편 정치달이 20세에 요절했다.
화완옹주는 옹주
화순옹주(和順翁主·1720~1758)는 영조의 둘째 딸이며 정빈 이씨(1694~1721)의 소생이다. 2세 때 어머니 정빈 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9세 때에는 한 살 위인 오라버니 효장세자(추존왕 진종·1719~1728)마저 세상을 떠났다.
화순옹주는 13세 때 동갑인 경주 김씨 판돈녕(判敦寧) 김흥경(金興慶)의 넷째 아들 김한신(金漢藎·17
교동현군(喬桐縣君) 고씨는 1099년(숙종 4년)에 평범한 관인 가문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평범한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녀의 주변인물 중 사서(史書)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녀의 가계에 대한 정보는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묘지에 새겨둔 묘지명(墓誌銘)을 통해 겨우 알 수 있는데, 아버지 고종재(高宗載)의 경우 강화도의
숙창원비(淑昌院妃) 김씨는 위위윤(尉衛尹)으로 벼슬을 그만둔 언양인(彦陽人) 김양감(金良鑑)의 딸로 태어났다. 평범한 관인가문 출신이었으나 그녀는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 그랬는지, 진사(進士) 최문(崔文)과 일찍이 혼인했으나 곧 과부가 되었다.
그 뒤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다.
고려 후기의 대학자 이제현(李齊賢·1287~1367)의 아내 권씨(權氏)는 1288년(충렬왕 14) 고려 후기 최고 문벌 중의 하나인 안동 권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혈통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당대의 대학자이자 최고 관직을 지낸 권부(權溥)와, 재상을 역임한 유승(柳陞)의 딸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는데, 가문의 화려함은 선대(先代)에 그치지 않았
고려 무인집정(武人執政) 중 하나인 이의민(李義旼·?~1196)의 처 최씨의 혈통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없다. 다만 남편 이의민의 아버지가 소금장수이고 어머니가 사찰의 종이었던 것으로 보아, 최씨 또한 부귀한 혈통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비천한 핏줄을 타고 태어났지만 남편 이의민은 신장이 8척이나 되었으며 힘으로는 누구도 당할 자가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