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세월은 약이 아니다 - 김수민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

입력 2014-05-14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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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뭐냐고 친구가 물었다. 공주가 대답했다. “딱 25m 그 만큼만 가보고 싶어 진짜로.” 친구들은 꿈에 핀잔을 준다. “공주야, 가봤자… 벽이야, 벽.” 공주를 기다리는 벽은 수영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공주를 에워싼 어른들은 높은 담처럼 아이를 밀어낸다. 끊임없이 밀려나는 공주는 ‘성폭행 피해자’다. 공주는 ‘마흔 세 명의 고릴라’를 만났다고 그날들을 묘사한다. 공주는 명백하게 죄가 없다. 그러나 결국 도망치는 것도 공주다. 영화 <한공주>의 이야기다.

세월을 비껴간 상처가 있다. 영화의 이야기는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을 기반으로 한다. 실제 피해자 또한 계속된 전학 끝에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어느 한 곳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그네의 부박한 삶은 공주와 겹쳐진다. 성폭행은 고문을 비롯한 모든 폭력이 그러하듯 위력으로 사람의 정신과 의지를 굴복시킨다는 점에서, 개인의 존재를 더없이 무참하고 작게 만든다. 사람이 사람이기를 포기시키고, 개인의 존재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일이기도 하다.

상처는 때때로 집단적으로 공유된다. 전쟁 등의 기억이 그러하다. 꼭 내가 겪은 상처가 아니더라도 시간의 흐름이 켜켜이 쌓여 집단의 아픔으로 자리 잡는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집단적 기억을 ‘집단 무의식’으로 명명했다. 우리에겐 위안부 문제가 대표적이다. ‘정신대, 위안부, 일본군 성노예’로 달리 호명되지만 한목소리로 그들의 몸과 영혼, 정체의 흔들림을 고발한다. 반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 모두의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위안부는 철저히 ‘피해자’의 입장에서 모멸을 곱씹게 하는 역린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또 다른 폭력이다. “정부도 일본 정부도 우리가 죽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면 이야기는 사라질 테니까.” 위안부 할머니의 울분을 삭히는 건 시간일까. 역사는 아니라고 소리친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 출구에서는 사과를 나눠줬다. 상처를 치료하는 약은 시간이 아니다. 그들을 어루만지는 것은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와 보상이며, 그도 때론 모자란 일인 것이다. 공주를 밀어내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시간에 아픔이 흐릿해지기를 기다려서는 안된다. 오히려 아픔은 선연히 기억해야 한다. 세월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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