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論]사회적기업에 상상력을 허하라- 정흥모 이야기너머 대표

입력 2013-11-05 10:52
  • 가장작게

  • 작게

  • 기본

  • 크게

  • 가장크게

지난봄에 시작해서 뜨거웠던 여름을 거쳐 장장 8개월 동안 장애인복지관에서 생애사 쓰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리고 지난 주, 우리는 중도장애인과 장애인 어머니들이 써낸 글을 묶어 ‘뜻밖의 여정’이란 이름으로 한 권의 책을 펴냈다. 책이 도착하던 날, 복지관에서는 환호성이 터졌다. 왜 아니 그랬으랴. 책이 나오기까지 살아온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고, 중간 중간 좌절을 겪는 일도 여러 번 경험했다. 고통, 인내, 좌절, 용기, 넘어야 할 산들을 하나, 둘씩 넘어서고 마침내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기까지, 가치를 떠나서 이 한권의 책이 담고 있거나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아니고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책이 인쇄되고 있던 바로 그 시각, 나는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기 위한 심사대에서 한껏 몸을 낮춘 채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2년 전, 보통사람들의 기록을 남기고 축적해서 사회적 자산으로 공유해보자며 작은 기업을 하나 만들었다. ‘기억으로 쓰는 현대사’를 주제로 잡고, ‘기록과 치유’를 미션쯤으로 구상했다. 무슨 일이고 간에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으면 좋겠다, 생각은 이 기업이 갖는 좀 더 본질적인 목표였다. 프로그램에 대한 설계를 제법 오랫동안 구체적으로 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시작하고 보니 부족한 게 많았다.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이 두 번을 거듭하는 동안 기업에 대한 설명하나도 간략하게 정리해 내지 못했다. 말하자면 2년이 넘는 아까운 시간들을 스스로 배우고 공부하는데 투자한 셈이 되었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 지난 봄, 드디어 우리는 당초 목표했던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이후로 지금까지 기초형 사회적기업 육성단계를 거쳐 광역형 예비사회적기업 인증을 받기 위해 모두 3번의 심사를 거쳐야 했다. 어색한 심사대에 서서 많은 질문을 받았다. 그중 첫 번째 심사과정에서 받았던 질문 하나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이런 게 없다고 해서 먹고사는 일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이 되기나 하겠어요?”

세 번째 심사를 받으러 갔을 때, 심사위원 한 분이 아이템이 독특하다며 기존 사회적기업에 이런 사례가 있는지 내게 물었고 친절하게도 다른 심사위원이 대답을 대신해주었다.

“돈을 만들기 쉽지 않아요. 성북구에 이런 게 하나 있었는데 결국 잘되지 않았죠.”

정리하자면 이렇다. 이와 비슷한 기업이 있었다. 돈(매출)을 벌지 못했다. 따라서 지속가능하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나는 이 사람의 확신이 편견에 불과하다는 걸 쉽게 알아차렸으나 심사를 받는 상황에서 반론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실사를 받으면서 겪었던 여러 상황들이 떠올랐다. 실사단은 그때 사회서비스 서비스 실적을 확인하기 위해서 장애인 부모님들 중에 어떤 분이 취약계층인지 증명하라고 요구했다. 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같이 신문 만들기 수업도 몇 주간 했는데 이 아이들이 취약계층이라는 증명도 받아서 제출해야 한다고 했다. 차마, 할 짓이 아니어서, 차라리 사회적기업 인증을 그만두겠다는 생각으로 증거 제출을 포기했었다.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기업을 만들 생각은 아예 접어야겠구나’ 하는 것이 그때 든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이 요구하는 조건을 맞추기 위해서는 당초 목표로 했던 가치나 철학을 포기하고, 심지어 인간에 대한 도리마저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실상은 반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적기업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처음 가졌던 철학이나 가치를 잊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그 첫 믿음을 굳게 부여잡고 구체화해 나가는 과정이 사회적기업이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전문가라면 그렇게 유도해 주어야 하는 게 아닌지, 많이 아쉬웠다. 사회적기업 뿐이 아니다. 마을기업이든 협동조합이든 사회적 경제의 터전을 일구는데 필요한 가장 근본적인 바탕은 무엇인가. 상상력이 아닐 런지. 사회적경제의 구상이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틀을 보완하거나 바꾸는 작업이거나 간에 그 목표가 새로운 세상을 향한 도전이라면 가장 보호받아야 하는 가치는 꿈꾸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되어야 한다. 상상력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꿈꿀 수 있는가. 어떻게 도전할 수 있겠는가.

지금 이 분야에서 전문가들이 할일이 있다면 그건 도전하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지원하는 일이 되어야 마땅하다.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추가취재 원해요0

주요 뉴스

  • 뺑소니까지 추가된 김호중 '논란 목록'…팬들은 과잉보호 [해시태그]
  • 높아지는 대출문턱에 숨이 ‘턱’…신용점수 900점도 돈 빌리기 어렵다 [바늘구멍 대출문]
  • "깜빡했어요" 안 통한다…20일부터 병원·약국 갈 땐 '이것' 꼭 챙겨야 [이슈크래커]
  • 단독 대우건설, 캄보디아 물류 1위 기업과 부동산 개발사업 MOU 맺는다
  • '1분기 실적 희비' 손보사에 '득' 된 IFRS17 생보사엔 '독' 됐다
  • 알리 이번엔 택배 폭탄…"주문 안 한 택배가 무더기로" 한국인 피해 속출
  • AI 챗봇과 연애한다...“가끔 인공지능이란 사실도 잊어”
  • 막말·갑질보다 더 싫은 최악의 사수는 [데이터클립]
  • 오늘의 상승종목

  • 05.17 09:13 실시간

실시간 암호화폐 시세

  • 종목
  • 현재가(원)
  • 변동률
    • 비트코인
    • 90,848,000
    • -2.1%
    • 이더리움
    • 4,097,000
    • -3.26%
    • 비트코인 캐시
    • 619,500
    • -4.32%
    • 리플
    • 717
    • -0.69%
    • 솔라나
    • 222,400
    • -1.2%
    • 에이다
    • 641
    • +1.1%
    • 이오스
    • 1,118
    • +0%
    • 트론
    • 173
    • -1.7%
    • 스텔라루멘
    • 148
    • +0%
    • 비트코인에스브이
    • 86,900
    • -1.75%
    • 체인링크
    • 21,680
    • +11.93%
    • 샌드박스
    • 606
    • -0.98%
* 24시간 변동률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