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김경철 부국장 "'악화'에는 황금으로 맞서라"

입력 2012-09-19 10:48 수정 2012-09-19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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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가 통치하던 16세기 영국에선 악화(惡貨)가 판을 치고 있었다. 주범은 왕 자신이었다. 전쟁 비용과 6번의 결혼 등으로 씀씀이가 컸던 그는 자금난을 견디다 못해 1542년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표면 액수는 그대로 둔 채 동전의 함량을 절반 이상 줄여 그 차액을 챙기는 속임수였다. (통화가치의) 대타락(Great Debasement) 등의 이름으로 역사책에 등장하는 바로 그 사기극이었다.

이 바람에 순도가 높은 양화(良貨)는 금고 속으로, 화로 속으로 속속 퇴장했고 대신 실제 가치가 액면 가치보다 떨어지는 악화가 대량 유통됐다. 악화는 이후 한 세기 이상 창궐하며 물가를 마구 올려댔다. 영국 시민의 삶이 더 팍팍해진 것은 물론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재정고문이던 토머스 그레샴은 이런 난맥상을 ‘악화가 양화를 구축(驅逐)한다’는 말로 정리했다.

악화 소동은 오늘날에도 한바탕 터질 것만 같다. 주범은 미국이고, 종범은 유럽이다. 미국 중앙은행이 13일 3차 양적완화란 이름으로 사실상 돈을 무제한 풀기로 했다. 앞서 유럽 중앙은행도 재정 위기국의 채권을 무제한 사들이기로 했다. 달러와 유로화가 폭포수처럼 쏟아진다는 뜻이다. 이유는 나름 고매하지만, 세계 양대 화폐가 악화의 영역으로 들어서고 있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3차 양적완화를 실시한) 미국 중앙은행은 위조지폐 프린터”라는 월스트리트의 비관론자인 마크 파버의 독설도 무리가 아니다.

다시 그 옛날로 돌아간다. 종양처럼 번지던 악화도 마침내 두 차례의 화폐개혁에 사그라져 갔다. 1차는 1696년의 대주화개혁(Great Recoinage)이었다. 은화를 새로 주조하는 대대적인 화폐개혁이었다. 주화의 금과 은의 비율을 왕이 마음대로 잡을 것이 아니라 법률로 정하자고 주장한 경험주의 철학자 존 로크도 한몫을 했다.

2차 수술은 금본위제(Gold Standard)였다. 이번에는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이 기념비적인 활약을 펼쳤다. 조폐국장이던 1717년, 그가 발표한 ‘금과 은의 가치와 교환비율에 대한 보고서’는 금본위제도의 도화선이 됐다. 영국 정부는 보고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민간인이 황금을 조폐국에 가져와 정부가 규정한 무게의 화폐를 주조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는 또 금화의 신용을 지키려고 헌신했다. ‘교수형을 즐긴다’는 괴담까지 들을 정도로 위조범을 무섭게 소탕했다. 요즘처럼 동전 둘레에 깔깔한 톱니 모양을 새겨 위조를 방지하는 기술도 주화에 탑재했다. 이후 깎아내기(clipping)나 땀내기(sweating. 가방에 금화 여러 개를 넣은 뒤 흔들어 떨어지는 금가루를 모으는 수법) 같은 금화 도둑질은 크게 줄었다.

마침내 영국의 금화는 가장 믿음직한 물건인 황금과 동격이 된 것이다. 승승장구하던 군사력과 경제력까지 가세하면서 영국 돈은 마음 놓고 편하게 쓸 수 있는 세계 중심 화폐로 발전했다. 2차대전 직후 브레튼우즈 체제가 출범하기까지 기축통화 역할을 하며 유니언 잭의 든든한 금융 인프라 역할을 했다.

다시 현재. 달러와 유로화의 ‘대타락’을 막을 수 있을까? 대선을 앞둔 미국 공화당은 지난달 28일 전당대회에서 ‘달러화의 고정 가치를 설정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위원회 설치’를 강령에 적시했다. 71년 닉슨 행정부의 금 불태환(不兌換·달러를 금으로 바꿔주지 않는 것) 선언이후 폐기됐던 금본위제의 부활을 염두에 둔 것이다. 2년전 세계은행 총재였던 로버트 졸릭도 금본위제 복귀를 제안했다.

뉴턴과 로크를 불러오려는 이런 시도가 가까운 장래에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명하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각국이 사실상 ‘무담보’로 찍어내는 화폐의 신용이 하락하고, 대신 화폐의 제왕이었던 금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18일 세계금위원회에 따르면 한국의 금 보유량은 70톤으로 100개국 중 40위다. 지난해부터 보유량을 꾸준히 늘려온 점은 고무적이다. 그러나 외환보유액에서 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0.9%로, 70%를 넘는 미국과 독일 등 선진국과 비교하면 턱없이 낮다.

대폭풍이 몰려올 것만 같다. 통화 맞교환 같은 여러 가지 안전망이 있다. 그러나 ‘대(大)’급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하다. 신용의 최강자는 지금도 금이다. 황금으로 악화의 창궐에 대비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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