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들의 부침]평소엔 오른팔·위기땐 희생양…'가신'들의 인생사

입력 2012-03-12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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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정몽헌 회장(오른쪽)과 김윤규 당시 현대아산 사장이 2003년 2월 고성 금강산콘도에서 대북송금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마친 뒤 회견장을 나오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한국 재벌그룹의 역사는 오너와 가신그룹의 활약으로 함축된다. 가신들의 역할은 오너를 보필하는 것이다. 때문에 평소 오너의 최고 관심사와 현안에 대한 해법 제시는 가신들의 최우선 역할이다. 반면, 오너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자신을 몸을 바쳐 오너를 보호한다.

점차 전문경영인들이 늘고 있는 가운데 가신들의 활약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한국 경제사에 있어 가신들이 미치는 영향은 아직까지 상당하다는 점이다. 한국 경제사 속에 그려진 대표적인 가신들의 모습을 살펴봤다.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가신 2인자들= 국내 재벌그룹 가신들의 권력은 막강했다. 과거 재벌그룹들이 비서실과 종합기획실(일부 기업은 회장실, 부속실 등의 이름으로 운영) 등을 운영하며 계열사의 경영까지 총괄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가신들의 직책은 대부분 비서실장이 많았다. 이와 함께 가신들은 대부분 ‘재무통’이란 공통점이 있다. 그룹의 곳간을 책임진다는 것은 그만큼 오너의 신뢰가 두텁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삼성그룹의 이학수 고문, SK그룹 김창근 부회장, LG그룹 강유식 부회장 등도 이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최근 퇴진한 현대자동차그룹의 가신들인 이정대 부회장과 이재록 부사장도 대표적인 재무통이다. 오너의 전폭적인 신뢰에 자금흐름을 꿰뚫는 실력까지 갖춘 이들에게 권력이 모이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재계 관계자는 “1998년 외환위기 이후 2인자들의 영향력이 그나마 줄어든 것”이라면서 “과거 창업세대 땐 가신그룹의 권력이 더욱 막강했고, 이와 비례해 오너에 대한 충성심도 지금보다 더 대단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삼성 소병해 전 비서실장… 가신의 대명사= “소 실장은 면도날과 같은 사람이었으며, 특히 기억력과 분석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삼성그룹에서 은퇴한 재계 원로의 한 마디다. 발언 속 주인공인 ‘소 실장’은 삼성그룹 전 비서실장이었던 고(故) 소병해씨를 말한다.

소병해 전 실장은 1978년부터 1990년까지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를 보좌한 대표적인 ‘삼성의 2인자’다. 삼성그룹의 전산화를 정착시키고, 국제금융과 품질관리 개념을 도입해 삼성의 성장에 견인차 노릇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소 전 실장은 워낙 재무와 관리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치밀함까지 갖춰 이병철 회장의 신임을 독차지했다.

이병철 회장의 신임이 두터워질수록 소 전 실장의 그룹 내 영향력도 커졌다. 일부 계열사 사장들은 소 전 실장의 눈치부터 살피기 시작했다. 이 같은 소문은 이병철 회장의 귀에도 들어갔다.

“소군, 자네는 직책이 뭐꼬?” 이병철 회장이 어느 날 소 전 실장에 건넨 질문이다. 이에 소 전 실장은 “예, 저는 이사입니다”라고 답하자, 이병철 회장은 “그래 이사제, 이사맞제”라며 확인성 경고를 줬다고 한다. 소 전 실장에게 권력을 과시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이병철 회장의 무언의 경고다. 오너보다 큰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 바로 철퇴를 맞는 것이 가신들의 순리다.

소 전 실장은 1987년 이병철 회장 사후에도 새로 취임한 이건희 회장을 3년 간 보좌하며 2대 경영 승계의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그는 1990년 삼성생명 부회장으로 전출되면서 사실상 그룹의 중심에서 빠지게 된다. 이건희 회장은 취임 3년차부터 소 전 실장으로 대표되는 구(舊) 가신 세력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밑으로 소 실장의 비리를 수집, 그가 반기를 들지 못하도록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후문이다. 소 전 실장은 ‘이건희 시대’를 맞이하면서 쓸쓸히 삼성의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가운데)과 부인 홍라희씨가 2010년 2월 서울 중구 순화동 호암아트홀에서 열리는 고 호암 이병철 회장 탄생 100주년 기념 음악회에 참석하고 있다. 이학수 전략기획실장이 이 회장의 뒤를 따르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이건희의 남자’ 이학수 전 삼성그룹 전략기획실장… 3세 경영 위해 퇴진?= 삼성가(家)의 가신 역사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건희 회장 시대엔 소 실장에 이어 이학수 전 삼성그룹 전략기획실장이 대표적인 가신 역할을 했다. 이 전 실장은 1996년 그룹 비서실장을 맡은 뒤 지난 15년간 줄곧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삼성 경영을 총괄해왔다.

이 전 실장은 지금까지 이건희 회장 대신 두 번이나 ‘별’을 달았다. 2004년 17대 대선에서 정치권에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았고, 2009년엔 김용철 변호사 양심선언으로 촉발된 비자금 사건으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5년을 받은 바 있다. 이건희 회장이 위기에 처했을 때 온몸으로 이를 막아내는 역할을 했다. 이와 함께 이 전 실장의 영향력도 커지면서 이른바 삼성의 ‘실세’가 됐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2010년 11월 이 전 실장을 삼성물산 고문으로 사실상 내쳤다. 이어 지난해 말엔 삼성물산 고문직에서도 해촉했다. 이는 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으로의 경영권 승계와 발맞춰 영향력이 커진 이 전 실장과 그의 인맥들을 청산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조선시대 태종 이방원이 아들 세종을 위해 정도전 등 선친 가신세력들을 숙청한 것과 비유되기도 한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10월 이 전 실장의 중학교 후배였던 이종철 삼성의료원장이 자리에서 물러난 것도 사실상 이 고문 인맥 정리의 한 수순 아니겠느냐”면서 “이건희 회장 취임 초기에 소병해 전 비서실장 인맥들이 정리됐던 것과 흡사하다”고 설명했다.

◇비운의 현대家 가신… 김윤규 전 현대아산 부회장= 김윤규 전 현대아산 부회장은 ‘비운의 가신’으로 통한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생존 당시부터 이익치, 김재수씨와 함께 ‘현대가의 3대 가신’ 중 한 사람으로 꼽히며 대북사업을 주도해 왔지만 2005년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에 의해 퇴출당했기 때문이다.

김 전 부회장은 1998년 현대 남북경협사업단장을 시작으로 줄곧 현대의 대북사업 최일선에서 활동해 왔다. 지금은 사망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과거 현대그룹의 방북 시 김 전 부회장을 반드시 참석하도록 부탁했을 정도로 대북사업에 있어 영향력이 컸다.

하지만 현대그룹이 정몽헌 회장 사후 현정은 회장 체제로 재편되자 김 전 부회장은 운신의 폭이 대폭 줄었다. 현정은 회장과 잡음이 일기 시작하더니 결국 2005년 현대아산 대표이사직을 박탈당했다. 한 평생 현대그룹의 2인자로서 일생을 바친 김 전 부회장으로선 불명예스러운 퇴진이었다. 자체 감사 결과 개인비리가 드러났다는 게 대외적인 대표이사직 박탈 배경이었지만, 현정은 회장과 대북 사업 주도권을 둘러싸고 벌인 갈등이 주원인이라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현대그룹 내부에서도 김 전 부회장의 박탈을 두고 “사실상 김 전 부회장이 토사구팽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오갈 정도였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사실 당시 김윤규 전 부회장은 신입사원 연수회 때 자신의 부인을 대동하는 등 오너처럼 행세하는 모습이 적지 않았다”면서 “이제 막 경영권을 찾은 현정은 회장으로선 김 전 부회장의 존재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왼쪽 세번째)과 손길승 당시 경영기획실장(오른쪽 첫번째)이 1989년 계열사를 방문, 경영정보시스템(MIS) 시연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가신에서 그룹 총수까지 오른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 전문경영인 출신으로는 아주 드물게 대기업의 명예회장 자리에 오른 사람이 있다.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이다. 손 회장은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의 대표적인 가신으로 통한다. 1978년부터 98년까지 최종현 회장의 보좌역을 충실히 해 뛰어난 2인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손 회장은 1974년 선경합섬 경영관리반장을 맡은 이래 SK그룹에선 ‘붙박이 기획실장’으로 통했다. 유공(현 SK에너지),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인수 등 현재 SK그룹 주력사업의 기틀을 잡는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최종현 회장은 계열사 경영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그룹 계열사 조정 역할은 당시 경영기획실장이었던 손 회장의 몫이었다. SK그룹의 한 관계자는 “과거 최종현 회장이 출근하면 맨 처음 손길승 경영기획실장을 찾을 정도로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사이였다”고 말했다.

손 회장은 최종현 회장 사후인 1998년 SK그룹 총수로 추대됐다. 최종현 회장 이후 후계구도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당시 최태원 (주)SK 회장의 후견인 역할을 자처했다. 2003년 초엔 SK글로벌·SK해운 분식회계, 계열사 부당지원,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 등 고초를 겪으면서도 오너인 최태원 회장의 방패막이 역할을 했다. 손 회장은 2004년 초 영장실질심사 당시 “내가 책임자면 내가 다 알아서 하는 것이지 (최태원 회장과) 상의를 왜 했겠느냐”면서 최태원 회장의 개입 혐의를 적극 부인하기도 했다.

이후 손 회장은 그룹 회장직은 물론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직까지 내놓아야 했지만 2008년 SK텔레콤 명예회장으로 복귀한다. ‘오너-전문경영인 투톱 체제’는 막이 내렸지만, 다른 기업의 가신들과 달리 팽의 수순은 밟지 않았다. 어찌 보면 마지막까지 가신으로서 예우를 받은 드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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