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뿌리를 찾아서]⑩효성그룹-울산 동양나이론 공장

입력 2011-12-27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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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백색의 실 나오던 날 '글로벌 효성' 시작됐다

▲동양나이론은 1966년 설립. 1968년 울산 공장 준공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생산활동을 시작해 1973년 주식을 상장했다. 1996년 효성T&C로 상호를 바꿨으며 이듬해 효성물산, 효성중공업 등과 합병하면서 현재의 회사명인 효성으로 탄생했다. 사진은 동양나이론 울산공장 준공식.
기업은 신기원이 필요하다. 효성그룹의 역사는 동양나이론 공장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양나이론 공장 준공은 효성그룹 역사의 진정한 출발점일 뿐만 아니라 한국공업사에서도 하나의 사건이였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대형 공장은 대부분 턴키(Turn Key)방식이었다. 공장설계-건설-가동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기술 제공자가 책임을 지는 방식이다. 기술을 몰라도 공장을 가동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 기업에게 기술은 없었다. 이런 당시의 사정을 고려하면 동양나이론 공장은 하나의 시험대였다.

▲독자사업을 구상하는 창업주 조홍제 회장(집무실에서, 1962년)
◇효성의 그날=1968년 4월 23일 효성 회장 집무실. 책상 위에는 전날 올라온 결제서류의 결제란은 마지막 칸 하나만 남겨 둔 상태다. 만우(고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자 호)는 좀처럼 만년필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회장님 다 되었습니다. 원료를 넣어도 좋겠습니까?” 울산공장 배 공장장의 목소리가 수화기 넘어로 들려왔다. 만우는 3일전부터 동양나이론 공장 건설 지원과 가동 준비를 위해 울산 현장으로 내려가 있는 조석래 상무에게 미리 언질을 해 놨다. “시운전에 나는 입회하지 않겠네. 무슨 결함이라도 생기면 현장 책임자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못 볼 것 같네.”

울산 동양나이론 공장. 폴리마 압출구와 방사공정의 노즐 앞에 현장 전 임원과 설비도입선인 짐머사의 기술진, 기계납품 업체 관계자들이 조용히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켠에 서 있던 임직원 부인들은 손을 합장하고 수십번 머리를 조아리며 ‘성공’이라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다.

마침내 가동 스위치가 눌러졌다. “야 나왔다!” 노즐을 통해 은백색의 가느다란 실들이 뿜어져 나왔다. 효성그룹의 미래를 약속하는 도약대가 꿈이 아닌 실제로 그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였다.

◇비전이 길을 만든다=효성그룹 조석래 회장은 지난 2003년 만우 고 조홍제 회장의 일화집을 내며 이같은 내용의 동양나이론 공장 준공을 가장 먼저 꺼냈다.

공장을 준공하기까지 참으로 많은 문제가 있었다. 나일론 제조기술의 도입문제, 차관문제, 기계의 설비 및 발주 등 여러 가지 실무적 난관들이 중첩해 있었다. 그러나 만우와 실무팀들이 역점을 둔 것은 향후 세계 시장에 있어서 경쟁력을 갖는 것이었다. 1965년 2년 가까운 시간을 들여 검토를 거듭해온 나일론 제조기술의 선정 문제를 매듭지었다. 사실 공업분야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의 한 가지가 기술 선정이다. 신설회사의 경우에는 기술의 선정 여하에 따라 사운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대상 업체는 나일론 원사 생산 업체인 일본의 니혼 레이온(Nihon Rayon)사와 설비 전문업체인 서독의 빅커스 짐머(Vickers Zimmer)사로 압축이 됐다.

설계 아이디어면으로나 기술체계에 있어 상대적으로 구식인 일본 것을 택할 경우, 서독 것보다는 훨씬 시설투자의 규모가 작아도 되고 운전 노하우도 그대로 쓸 수가 있어, 비용이 절감된다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실무진은 짐머사를 선택했다. 핵심적인 기본 기술만 도입하고, 운전 노하우 등은 기술진 자체에서 개발해 나갈 방침을 전제로 한다면 짐머사가 제안한 기술 계약조건이 더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초기 투자가 적다는 이점만 보고 구식인 기술체계를 택한다면 나날이 달라지는 기술 환경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향후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자 할 때 많은 제약을 받게 될 것이고, 나아가서는 그러한 기술 조건이 두고두고 기업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가 될 수도 있었다.

고분자 공업인 나일론 공장을 세우겠다고 하면서도, 당시 한국에는 고분자 공업의 핵심기술인 ‘중합’이란 용어 자체를 이해하는 기술자가 한 사람도 없던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처음부터 미래의 기술 개발을 염두에 두고 기술 도입 업체를 선정했던 것이다.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렸다.

▲동양나이론 울산공장 건설현장을 찾은 조홍제 회장.
◇현실을 넘은 파격= 동양나이론 건설 과정은 파격이 많았다. 차관 공여국에서 설비를 일괄 구입하던 관행을 깬 것이 그것이다.

1960년대 한국은 차관 경제 시대였다. 한국 사회가 자력적 경제성장을 위한 선행조건을 구비하지 못했던 시절였다. 정부가 앞장서서 외자를 도입하고 재정자금도 활용하여 성장잠재력이 큰 산업에 자금을 배분하던 시기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선진국의 차관을 도입해 공장을 건설하면서도 공여자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기계를 구입하고 공장을 건설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우리는 설비에 대해서 아는 바가 많지 않으니, 필요한 설비를 알아서 구입하여 좋은 공장이 건설되도록 잘 부탁합니다.” 이것이 그때까지의 관행이였다.

설비의 내용도 잘 모른 채 차관 또는 기술 공여자에게 ‘패키지(Package)’, ‘턴 키(Turn Key)’ 방식으로 설비의 일괄 구매를 의뢰하기 일쑤였다. 만우에게도 당연히 그런 요구가 있었다. 하지만 만우는 동양나이론 공장을 옛 방식으로 건설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차관교섭의 단계에서부터 ‘당신들의 간섭없이 우리가 원하는 설비를 자주적으로 구입하도록 보장하고, 또 용도에 대해서도 일체 관여하지 말 것’이라는 조건을 달아 관철시켰다. 돈은 빌려주되 그 돈을 어떻게 쓰는 지는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선 설계 단계에서 자체 기술진을 참여시키는 것을 우선적인 조건으로 했다. 기술 제공사인 짐머사 측에는 나일론 원사 공장의 핵심 부분에 대한 설계 만을 담당시켜 지불해야 할 기술료를 최소화했다. 상세 설계는 회사 실무진이 설계의 내용을 배우고 소화하며 의견을 반영할 수 있도록 공동참여의 형식을 취했다. 이 방법은 매우 효과적이였다. 실무진들은 공장에 설치될 어떤 기계든 그 설계 단계에서 이미 그 성능과 특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부대시설(유틸리티) 전반과 건물의 설계 등은 효성의 실무진이 독자적으로 개발하도록 했다. 이는 모두 만우의 구상이었다. 그들에게 협조한다는 명목으로 실무진들을 기본 기술의 각 분야에 참여시켜, 이를 단시일 내에 완전 소화하도록 했다. 이 방식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드문 일이었다.

1960년대 한국 공업 수준은 기초적인 수준. 남의 기술을 빌려서 공장을 세워 그것을 우리 기술로 운전 생산하거나, 그 정도에도 도달하지 못해 운전조차 일부를 선진기술에 의존하는 실정이였다. 외국 기술에 영영 종속돼 독자 기술은 꿈도 꿀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만우와 동양나이론 실무진들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것은 기술 독립을 성취해야 하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비록 나일론 원사 생산의 기본 기술만은 외국 것을 살 수밖에 없었지만, 하루 빨리 이 기본 기술마저도 자체적으로 완전히 소화해야 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동양나일론 실무진들은 주어진 기회를 충분히 활용했다. 그리하여 1968년 4월 마침내 거대한 중합탑에서 새하얀 나이론 실이 쏟아져 나오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만우의 파격은 중요한 변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공장 건설 당시 기본 기술을 완전히 소화해 독자적인 기술체계를 확립한 실무진들은 계속된 공장 증설 과정에서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체 기술만으로 그 일을 감당해냈던 것이다. 이러한 첫 출발이 효성의 독창적인 신제품을 개발할 수 있는 기술력의 원천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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