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 서울 가양동 아파트 화재로 장애인 모자가 숨졌다. 아파트의 대피 매뉴얼에는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지 말라”는 말만 있다. 장애인이 화재로 숨지는 비율이 비장애인에 비해 4배 높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장애인은 재난 앞에서 투명인간이다. 장애인임대주택을 포함한 공공임대아파트 80%에는 스프링클러가 없다. 딸은 학교 대피훈련에서 매번 배제됐다. 매뉴얼에는 걷는 사람만 상정해 있어서다.
더 심각한 것은 ‘데이터의 턱’이다. 여러 안전 앱에는 장애인 대피 정보가 부족하다. AI 시대에 이 공백은 더 커진다. 김승섭 서울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챗GPT나 제미나이 같은 대규모언어모델(LLM)에게 물어본 결과 가상 한국인 1만 명 가운데 장애인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데이터에 없는 사람은 AI 설계 구조에서도 없는 사람이 된다.데이터의 턱부터 당사자 시민들과 함께 낮추어야 한다.
무의는 2025년부터 학생·교사들과 학교 접근성을 조사하는 모모탐사대를 운영한다. 일상의 장애접근성 공개부터 시작해야 재난 상황에서도 대처가 가능해서다. 모두의 1층X로컬 프로젝트에서는 8개 지역 장애인 130명과 동네의 휠체어 접근 정보를 모은다. 장애 당사자가 데이터 주권을 갖고 자기 동네의 접근성 전문가가 되는 걸로 시작해야 한다. 마침 국민의 안전권을 기본권으로 명시한 생명안전기본법이 통과됐다. 법은 긴급 대피가 어려운 장애인·노인, 재난 문자 이해가 어려운 이주민 등 취약계층에서 재난 예방, 대비, 대응, 복구 전 과정에서 일관된 특별 보호 대책을 마련하도록 명시했다.
재난약자들이 주인이 될 수 있는 재난안전체계를 만들면 어떨까. 장애당사자를 포함해 시민들이 만든 장애 접근성 정보를 공공성 있는 공개 데이터인 ‘공익데이터’로 정의하고 수집과 갱신을 지원해야 한다. 장애인이 이웃과 함께 훈련할 수 있는 ‘재난동행인’을 육성하고 정기 훈련을 제도화해야 한다. 이렇게 어디가 접근 불가능한지, 각각의 시민이 어떻게 대피할 수 있는지 실질적 대책을 마련하면서 물리적 접근성 자체를 높여야 한다. 결국 장애인이 사는 곳이 실제로 대피 가능한 공간이 되도록 해야 한다.
꿈 같은 이야기지만 현장 사례들이 없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이동약자 대피지도를 만들어야 한다. 계단을 내려갈 수 있는 피난용 휠체어가 있다면 이동약자와의 소방 훈련이 한결 수월하다. 미국 UC버클리에서는 장애인이 안전관리 책임자를 직접 맡아서 두세 달마다 소방당국과 함께 개별 장애당사자 학생들이 대피 가능하도록 훈련한다. 여기서 핵심은 소위 피난약자들이 직접 참여하는 데이터나 안전 체계 구축이다.
지난 10월 충남지역공동체활성화센터 ‘아우름’에서 장애당사자 학생과 건축학과 학생들도 함께 참여해 대안을 논의하는 워크숍을 가졌다. 이렇게 지역 공동체 공간에서 장애당사자들이 직접 참여해 일상 접근성을 높이는 공동체적 대안을 만드는 기회가 확대되어야 한다.
새로운 법적 조치도 필요하다. 경기도의회 차유미 의원은 ‘장애학생·교직원 재난대피 지원체계 구축 정책토론회’를 10월 28일 열고 전국 최초로 장애학생·교직원 재난대피 관련 조례를 준비 중이다. 이제 막 첫걸음을 뗀 장애인 재난 대책과 관련 법이 재난과 데이터 사각지대를 모을 수 있길 소망한다. 장애인이 휠체어를 버리지 않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나라. 그것이 이태원 이후 4년, 우리가 지켜야 할 약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