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테크 공급 선점⋯애플 협상력 약화
애플 플래시 구매비 60억→250억달러

AI 열풍이 반도체 시장의 오랜 갑을관계를 뒤집고 있다. 수년간 막강한 구매력을 앞세워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에 가격 인하를 요구했던 애플이 이제는 공급업체들의 가격 인상 압박에 직면했다.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빅테크 기업들이 메모리 물량을 대거 확보하면서 공급업체들의 협상력이 급격히 높아진 결과다.
28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최근 1년간 AI 데이터센터의 수요 급증으로 낸드플래시 메모리 가격이 약 5배로 뛰었다. 시장조사업체 테크인사이츠는 2년 전만 해도 애플의 플래시 구매량이 마이크로소프트(MS)ㆍ아마존ㆍ메타ㆍ구글의 합계보다 약 두 배 많았지만 현재는 이들 빅테크의 구매량이 애플의 두 배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메모리 업체들의 협상력도 크게 달라졌다. 일본 키옥시아는 올해 메타ㆍMSㆍ아마존과 높은 가격을 보장받는 장기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공급업체들이 과거 최대 고객이었던 애플보다 AI 기업과의 거래를 우선시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애플은 그동안 세계 최대 플래시 구매업체라는 지위를 활용해 공급업체들을 압박했다. 경쟁사에 더 낮은 가격으로 판매하지 못하도록 ‘최혜 고객’ 조항을 요구하고 회계장부를 열람해 실제 거래가격까지 확인했다. 가격 하락기에는 주문한 물량의 인수를 거부해 추가 할인을 끌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AI 투자 확대가 시장의 판도를 바꿨다. 2023년 GB(기가바이트)당 5센트까지 떨어졌던 낸드플래시 가격은 최근 30센트를 넘어섰다. 애플이 올해 지난해와 비슷한 물량의 플래시를 구매하는 데 지출할 금액은 250억달러(약 33조4250억원)로 추산된다. 지난해 60억달러의 네 배가 넘는 규모다.
애플의 고수익 사업인 저장용량 업그레이드에도 부담이 커졌다. 지난해 아이폰17 프로의 저장용량을 256GB에서 512GB로 늘리는 데 소비자는 200달러를 추가로 지불했지만 애플의 반도체 원가는 15달러에 불과했다. 올해 아이폰18 프로에서는 같은 용량 확대에 필요한 원가가 66달러로 급등했다.
애플은 최근 아이폰 가격을 평균 13% 인상하는 등 비용 상승분을 소비자에게 전가했다. 하지만 가격 인상이 소비자들의 교체 주기를 늦출 경우 판매량에도 부담이 될 수 있다.
월트 쿤 테크인사이츠 애널리스트는 “애플은 역사적으로 메모리 공급업체들과 매우 강경하게 가격 협상을 벌여왔다“며 “이제 힘의 균형이 바뀌는 상황을 공급업체들이 반기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AI 기업들의 장기 공급계약이 늘어나면서 애플이 과거와 같은 가격 협상력을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왔다. 과거 공급과잉과 저가 경쟁에 시달렸던 메모리업계가 AI 투자 붐을 계기로 가격 결정권을 되찾고 있다고 WSJ는 평가했다.



